[백투더 1969③]그해 여름 당신은 어디서 무엇을 했나 과학

[백투더 1969③]그해 여름 당신은 어디서 무엇을 했나

인간의 달 착륙을 바라보던 세계 시민들

2009년 08월 17일

1969년 7월 아폴로 11호의 달 정복은 미국뿐 아니라 지역과 인종, 이념을 떠나 전 세계를 감격과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대사건이었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었다.

인류 최초로 달에 상륙한지 40년이 지난 지금 본지는 그 때의 감동과 재미를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해 그 시기 동아일보 기사를 살펴봤다. 당시 평범한 대중들이 보였던 관심과 환호는 언론이 얼마나 이를 비중 있게 다뤘는지를 통해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에 1969년 6월 18일부터 8월 18일까지 동아일보에 보도된 아폴로 11호 관련 기사를 근거로 ‘백투더(Back to the) 1969’ 시리즈를 마련했다.

제1편 21일 2시 56분 20초 “인간 달에 섰다”
제2편 아폴로 11호가 남긴 잊혀진 이야기들
제3편 그해 여름 당신은 어디서 무엇을 했나


“약간 흔들리는 TV 화면에 인간이 달에 내려서는 모습이 비쳤을 때 모든 사람이 그랬듯이 미국 국민들도 말문이 막혔었다. 이름난 텔레비전 논설가들도 간간히 ‘참 대단하군요’ ‘저런’ 하는 탄성만 토할 뿐이었다. 사람이 달에 내려섰고 걸어다니고 있다는 경이적인 사실과 그 사실을 희미하게나마 우주공간을 건너 전해주는 텔레비전의 마술 앞에 모든 형용사는 빛을 잃고 말았다.”

“신문마다 초대형 활자, 짧은 표현, 지면의 3분의 2를 넘는 달 사진을 안배하여 1면을 짰다. 사상 최대의 활자를 썼다는 뉴욕타임스紙의 제목은 ‘사람 달에서 산책’이었고, 워싱턴포스트紙의 제목은 ‘독수리 내리다…사람 달 산책’이었다.”

아폴로 11호 발사…달 착륙…미국 시민은 축제 분위기 연출



1969년 7월 25일 아폴로 11호가 지구 귀환에 성공하자 미 항공우주국(NASA) 직원들이 국기를 흔들며 환호하고 있다. 출처 동아일보 1969년 7월 25일자 2면

사람이 달 위를 성큼성큼. 1969년 동아일보는 미국의 TV 방송과 신문이 보여주는 경이로운 광경을 7월 22일자 기사를 통해 상세히 설명했다. 미국의 보통 시민들은 ‘말문이 막혀 모든 형용사가 빛을 잃은’ TV 방송을 숨죽이며 지켜봤고, 초대형 활자와 달 사진이 지면 가득히 채운 신문 1면을 흥분과 함께 손에 쥐었을 것이다. 비록 아폴로 계획에 쏟아부은 천문학적 비용에 일부 비판적인 시각도 있었지만, 당시 동아일보가 전하는 미국 내 보통 사람들의 반응은 대체로 신명나는 축제 분위기에 가까웠다. 아폴로 11호가 발사된 16일자, 달 착륙에 성공한 다음날인 22일자 신문은 그 흥겨운 분위기를 아래와 같이 전했다.

“아폴로 11호가 발사되는 이 곳 케이프케네디 상가는 사상 최고의 경기로 아우성이며 술집마다 술이 없어 주문을 못 따르고 호텔 방은 무지무지한 고가로도 얻기 힘들다. (중략) 개인주택이나 아파트 등이 방 하나에 1박 요금 20~50달러를 받고 있는 형편이다. 고급 음식점의 예약이 끝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가설 음식점도 주문에 맞추기 위해 트럭들에 냉동장치를 해서 음식을 저장하고 있다. 상점마다 아폴로 11호의 작은 동메달과 우주사진엽서 등이 날개 돋힌 듯이 팔려 인류 신기원의 문전은 즐겁고 요란하기만 하다.”

“이곳 휴스턴에서 가장 바쁜 사람들은 바로 술집의 바텐더들과 밴드 연주자들이었다. (중략) NASA 본부의 직원들은 세 우주인이 착수(着水)에 성공하자 모두 의자에서 일어나 감격스러운 순간을 기뻐했고, 휴스턴 우주센터는 그동안 밤새워 일했던 직원들에게 착수 바로 그 순간 아폴로 착륙선이 그려진 넥타이 핀을 나눠 주었다.”

런던 도쿄 바르샤바…각국 반응 “굉장하다”

7월 16일과 21일은 세계 주요 도시의 시민들도 아폴로 11호를 관심 있게 주시하며 찬사를 보낸 날이었다. 동아일보는 영국 런던에 대해 “대부분 시민은 TV로 감격하며 발사광경을 주시했다” “런던 심장부의 트라팔가 광장에서는 아폴로 11호 우주인들의 달 착륙이 전해지자 하늘을 진동시킬 듯한 환희의 함성으로 넘쳐났다”와 같은 반응을 전했다.



1969년 8월 13일 아폴로 11호의 세 우주인들이 오색테이프와 성조기가 휘날리는 가운데 뉴욕 브로드웨이를 개선 행진하면서 환호하는 시민들에게 손을 흔들어 답하고 있다. 왼쪽부터 마이클 콜린즈, 에드윈 앨드린, 닐 암스트롱. 출처 동아일보 1969년 8월 14일자 2면
프랑스 파리에 대해서는 “모든 거리에 인적이 끊기고 모든 사람은 가정에서 TV로 역사적인 아폴로 11호의 발사를 보았다” “관광객들은 소형 TV와 라디오를 들고 공원 벤치에서 아폴로 11호의 발사를 지켜봤다”고 보도했다. 일본 도쿄에 대해선 “밤을 새며 달 착륙을 고대하던 일본인들은 달 착륙이 성공하자 ‘굉장하다’ ‘정말인지 믿을 수 없다’고 감탄사를 연발했다” “일본 전국의 TV 라디오 방송들은 이 역사적 순간을 보도하기 위해 모두 철야 방송을 했다”고 전했다.

동유럽 공산국가 폴란드의 바르샤바 시민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미국 대사관에 마련된 TV를 보기 위해 약 500명의 바르샤바 시민이 운집해 ‘굉장하군’ ‘놀라운데’ ‘야 성공이다’ 등 환호를 울렸다. 한 방송논평가는 ‘아폴로 11호 발사는 신기원을 수립하는 대사건으로 전세계가 최대의 관심과 감격과 조바심을 갖고 주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의 라이벌이자 적대국인 소련 모스크바 시민들도 신속하게 인류 최초 달 탐사에 관한 보도를 접했다. 동아일보 7월 16일자는 “소련 관영 타스 통신은 전례없이 아폴로 11호 발사 직후 세 우주인의 이름을 밝히고 ‘그들의 사명은 암스트롱과 앨드린을 달에 착륙시킨 뒤 다시 전원 지구로 귀환하는 것’이라고 보도했다”고 전했다. 또 22일자에는 “타스 통신은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한지 8분 만에 이를 재빨리 보도했으며, 이보다 1분 뒤 모스크바 방송도 최종 뉴스 시간에 7번째 뉴스로 논평 없이 짤막하게 보도했다”고 전했다.

아시아 중동 중남미 곳곳에서 전쟁…중국인, 인류 달 정복 까맣게 몰랐을수도

아폴로 11호가 발사되고 인간이 달을 밟은 날. 이처럼 세계 곳곳의 시민들은 잠시 일상에서 벗어나 그 경이로운 광경을 지켜봤다. 하지만 지구촌 한편에서는 그같은 잠시의 여유조차 허용되지 않는 곳도 있었다. 1969년 여름은 세계 역사의 격동기 한가운데에 놓여있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는 특히 전쟁이 많았다. 아시아에서는 베트남 전쟁과 중국·소련의 국경분쟁이 있었고, 중동에서는 이스라엘과 이집트가 연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중남미 지역에서는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의 전쟁이 한창이었다.

특히 세계 인구의 4분의 1을 차지하던 중국 국민은 마치 전혀 다른 세상에 홀로 동떨어진 것처럼 아폴로 11호의 존재 자체를 아예 몰랐을 가능성이 높다. 동아일보 16일자는 ‘중국에서는 완전 묵살’이라는 제목으로 중국 북경의 반응을 전했다.

“북경의 신문들은 16일 아폴로 11호 발사를 완전히 무시했다. 대신 프랭크 보먼 미국 우주인의 소련 방문과 그의 소련 요인과의 면담을 소개하면서 새삼 소련의 수정주의자들을 비난했다. 신화통신은 보먼의 소련 방문을 가리켜 ‘개탄할만한 또 하나의 이변’이라고 논평했다. TV 라디오 신문 등이 (아폴로 11호에 대해) 일제히 침묵을 지키는 통에 세계 인구의 4분의 1이 아폴로 11호의 역사적인 발사를 까맣게 모르고 지낼 것이다.”

蘇·中共 국경 분쟁…전면전 우려

그렇다면 당시 중국인들에게 최대 이슈는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대규모 전면전 양상으로 치달았던 소련과의 국경 분쟁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우리와 적대 관계인 공산권 내부에서 벌어졌던 양대 거두의 분열은 국내에서도 큰 관심거리였다. 이에 동아일보도 북경과 모스크바에서 전해오는 분쟁 소식을 연일 비중있게 전했다.



소련군의 중공 국경 침략을 항의하며 데모하고 있는 북경 시민들. 출처 동아일보 1969년 8월 7일자 4면
6월 17일자 1면에는 ‘소련군 150만 집결’ ‘蘇·中共 전면전 가능성’이란 기사가 실렸다. 20일자 2면 ‘중공 대병력 집결…소련 국경에 120만명’이란 제목의 기사는 “중공은 거세지는 소련의 국경 위협에 맞서 국방력의 40% 이상을 흑룡강 성과 신강 성의 변경지대에 배치하고 있다”고 있다고 전했다.

6월 27일자 1면 ‘蘇, 중공에 강력 조처’, 7월 9일자 1면 ‘蘇·中共 대규모 충돌’ 등의 기사는 아래와 같이 보도했다.

“소련 공산당은 26일 중공 지도자들의 반(反) 레닌주의적 노선과 그들의 분열주의 책동에 가차 없는 타격을 가하는 투쟁을 전개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중공군과 소련군은 8일 만주 북방 경계선인 흑룡강을 끼고 공군력까지 동원된 10시간에 가까운 일대 충돌을 일으켰다고 북평(북경)방송이 보도했다.”

8월에도 두 나라간 국지전은 계속됐다. 이에 동아일보는 ‘蘇·中共 대전은 일어날까’라는 특집 기획을 마련해 여러 차례 분석 기사를 싣기도 했다. 8월 15일자 2면 ‘蘇·中共 국지전 계속’ ‘蘇, 비상돌입…中共, 일전 각오’라는 기사는 “중공의 각 성(省) 방송들은 15일 밤 ‘중공 영토를 감히 침범하려든다’고 맹렬히 소련을 규탄, 성민(省民)들에게 ‘소련과의 일대 격전을 각오하라’고 촉구했다”고 전했다.

이스라엘-이집트, 인간 달 밟은 21일에도 치열한 전투 벌여

중소 분쟁 못지않게 동아일보가 관심 있게 다뤘던 전쟁은 수에즈 운하를 사이에 두고 벌어졌던 이스라엘과 이집트 간의 전쟁이었다. 6월 26일자 1면 ‘수에즈 일대서 격전’이라는 제목의 기사는 “이집트와 이스라엘 전투기들은 26일 아침 수에즈 운하 남쪽 홍해 상공에서 치열한 공중전을 벌여 (중략) 수에즈 운하 휴전선 90km 일대에서 야포와 장갑차, 탱크를 동원해 10시간 동안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고 보도했다.



수에즈 운하를 사이에 두고 벌어진 이스라엘과 이집트 전쟁에 관한 기사들. 출처 동아일보

7월 3일자 1면 ‘수에즈서 공중전’이란 기사는 “이스라엘 제트기들은 2일 수에즈 운하 상공에서 이집트 전투기들과 1967년 6월 전쟁 이래 최대 규모의 공중전을 벌여 이집트 미그기 4대를 격추시켰다”며 “이스라엘 특공대는 수에즈만의 한 이집트 해안경비초소를 기습, 이집트 군 13명을 사살함으로써 중동 위기는 악화 일로를 치닫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7월 9일자 2면에서는 점차 치열해지는 중동 지역의 전투 상황을 전했다. 이 기사는 “중동지역에서 지상전과 공중전이 점차 확대되고 있는 가운데 7일 밤 이집트 정규군이 중동전 이래 처음으로 수에즈 운하를 건너 이스라엘 영토를 침공했다”며 “8일 이스라엘과 시리아 공군기들이 이스라엘 점령 지대의 골란 고지 상공에서 치열한 공중전을 전개, 시리아 전투기 7대와 이스라엘 전투기 4대가 각각 격추됨으로써 중동 위기는 무덥고 긴 여름을 맞이하게 됐다”고 보도했다.

7월 10일자 4면에는 ‘구약 이래의 빙탄’이란 제목으로 이스라엘과 아랍 연합국 사이에 기습과 보복의 악순환이 벌어지고 있으며 아랍 측이 전쟁 준비를 갖추게 되는 이듬해에 전면전이 벌어질 것이라는 분석 기사가 실렸다.

닐 암스트롱이 달을 밟은 21일에도 양국 간 전투는 계속됐다. 21일자 2면 ‘이스라엘, 아랍공 대폭격’이란 제목의 기사는 “이스라엘 공군기들이 21일 수에즈 운하 너머로 출격하여 2시간 이상에 걸쳐 아랍공화국 군 야포 진지를 비롯한 주요 시설에 대해 전례 없이 대규모의 폭격을 가하고, 아랍 공군 전투기 5대를 격추했다”고 보도했다.

엘살바도르-온두라스, 축구 시합이 전쟁으로 번져

전쟁의 그림자는 중남미 지역에도 드리워져 있었다. 아폴로 11호가 발사된 7월 16일 이 지역의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아폴로 11호가 발사된 7월 16일 중남미 지역의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출처 동아일보 1969년 7월 16일자 2면
16일자 2면 ‘엘살바도르·온두라스 전면전 돌입’이란 기사는 “엘살바도르 공군기들과 육군이 14일 온두라스를 침공한데 뒤이어 온두라스도 이날 밤부터 반격을 시작, 2차대전 때 사용하던 코르세어 전투기로 엘살바도르의 각 도시 및 군사 기지를 폭격함으로써 축구 경기로부터 시작된 두 나라간의 충돌은 드디어 전면전으로 확대됐다”며 “엘살바도르 군은 온두라스 남부 고속도로를 따라 도처에서 백병전을 벌이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 기사가 언급한 것처럼 두 나라의 전쟁은 축구 경기가 발단이었다. 16일자 3면 ‘온두라스·엘살바도르 전면전 내력’이란 기사는 “축구로 전쟁이 일어난 데는 보다 깊고 오랜 양국 사이의 원한이 깔려 있다”며 “높은 인구 밀도를 가진 엘살바도르의 국민들은 직업을 찾아 인접 국가들로 넘어가 살고 있는데 온두라스는 자국 내에 30만 명의 엘살바도르 인이 살고 있고 그 중 많은 수는 불법체류자라고 주장해왔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이 기사에 따르면 6월 두 나라를 오가며 펼쳐진 월드컵 지역예선에서 양국 관중들 사이에 폭력이 오고 간 게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이 때의 격앙된 분위기는 이후 온두라스 일부 시민들의 자국 내 거주 엘살바도르 인에 대한 보복성 폭력으로 이어졌고, 양국 간의 외교관계 단절 선언을 거쳐 전쟁까지 발발하게 된 것이다.

베트남 전쟁, 연일 1면에 실려

해외 곳곳에서 벌어졌던 이같은 전쟁 소식은 당시 우리 국민들의 눈길을 끌기도 했지만, 그저 먼 나라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가까웠다. 당시 우리에게도 아폴로 11호 못지 않게 우리의 이목이 집중됐던 굵직한 이슈들이 있었다. 국제적으로는 베트남 전쟁과 미국 닉슨 대통령의 외교, 국내에서는 바로 박정희 대통령의 3선 개헌 시도였다.



1969년 6월 중순부터 한 달 동안 동아일보 1면에서 가장 비중있게 다뤄지던 국제 이슈는 베트남 전쟁이었다. 출처 동아일보
그해 6월 중순부터 아폴로 11호 기사가 넘쳐나기 시작하던 7월 11일까지 동아일보 1면에서 가장 비중있게 다뤄지던 국제 이슈는 단연 베트남 전쟁이었다. 한국군 창설 이래 첫 ‘전투병’ 해외파병을 했던 전쟁이기 때문이다. 당시 정부는 1964년 9월을 시작으로 해병대인 청룡부대, 육군의 맹호부대와 백마부대 등을 잇따라 베트남으로 파병했다. 이후 1973년 3월까지 연 인원 32만 명의 국군이 파병돼 4407명이 전사하고 1만 7060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 기간 한국 기업들도 베트남에 진출해 군수물자 납품과 각종 용역사업으로 전쟁 특수를 누리기도 했다.

1969년 6~8월 동아일보에서는 당시 자본주의 진영이던 남베트남의 정세와 베트남 전쟁의 진행 상황에 대한 보도가 주를 이뤘다. 특히 남베트남의 구엔 반 티우 대통령이 기사에 자주 등장했다. 미국의 막대한 지원을 받은 남베트남의 티우 정권은 당시 부정부패와 무능의 상징이었다. 티우 대통령은 1975년 4월 30일 호치민이 이끄는 북베트남에 사이공이 함락됐을 때 미국 군용기에 금괴를 잔뜩 싣고 누구보다 먼저 조국을 등졌던 인물이다.

6월 16일자 2면 ‘공산군 공세 격화’라는 기사는 “공산군은 15일 다낭, 출라이, 벤헤트 등 월남 전역의 10여 개 미군 기지 및 진지에 로케트와 박격포를 퍼붓는 한편, 아샤우 계곡의 미군 기지를 14일에 이어 또 다시 습격, 연합군에 대한 공격을 강화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6월 20일자에는 ‘사이곤의 초조와 비관’, 21일자는 ‘티우, 혁명적 계획 손질’, 28일자는 ‘철군, 미군의 메시지와 모험’ 등의 기사들이 1면에 비중있게 실렸다. 7월 3일자 1면에는 ‘월맹군, 남침 격감’과 ‘월맹군 철수, 남파 감소…하노이 진의는?’, 7일자 2면에는 ‘공산군 전역서 공세…사이공 등 44개 목표 포격’이라는 제목의 기사들이 전쟁 상황을 알리는 소식들을 쏟아냈다.

6월 20일자에는 남베트남 정권에서 횡행했던 부정부패의 일면을 볼 수 있는 기사가 실렸다. ‘월남 부유층 줄지은 해외도피’, ‘출국에 거액의 뇌물 거래’, ‘티우의 자녀도’, ‘매주 200명 꼴’ 등의 제목을 단 이 기사는 “자유 월남의 티우 대통령의 부인이 금년 초 스위스를 방문, 그 곳에 저택을 마련해놓고 돌아오는 즉시 자식들을 모두 (스위스로) 보내버렸다”고 전했다.

두 한국인, 월맹군에 잡혔다 탈출…캄보디아서 귀국 화제

한편 6월 18일에는 북베트남(월맹) 군과 캄보디아 군에 잡혔다가 간신히 탈출한 두 한국인에 관한 이야기가 화제를 모았다. 이날 신문은 ‘캄보디아 두 한국인 석방’ ‘꿈만 같다…감격의 환호성’ 등의 기사로 이 소식을 비중있게 전했다. 이들이 고국으로 돌아오기까지의 과정은 마치 한 편의 전쟁 액션영화다.



1969년 6월 18일자 1면은 북베트남(월맹) 군과 캄보디아 군에 잡혔다가 간신히 탈출한 두 한국인에 관한 이야기를 전했다. 출처 동아일보 1969년 6월 18일자 1면
“캄보디아에서 간첩죄의 누명을 쓰고 억류중이던 박정환 소위(27·용산구 이태원동 군인아파트 10동 113호), 파월 기술자 채규창 씨(39·전북 군산시 구암동 329)가 제3국을 통한 다각적 외교 활동에 의해 석방, 18일 오후 항공편으로 고국으로 돌아왔다.

1968년 1월 베트콩의 구정 공세 때 메콩델타 지역의 미토에서 월맹군에게 포로가 돼 베트콩 포로수용소를 거쳐 북괴(북한)로 이송돼가던 도중 태권도 5단의 박 소위가 월맹군 3명을 태권도로 때려누이고 캄보디아로 탈출했다.“

이 기사에 따르면 박정환 소위와 채규창 씨는 베트남과 캄보디아 사이 국경 지대의 밀림 속을 헤매다 캄보디아 군에게 잡혔고, 이후 간첩으로 몰려 캄보디아에서 억류중이었다가 외교 협상끝에 겨우 풀려나게 됐다.

당시 동아일보 6월 20일자 3면은 채규창 씨의 증언을 토대로 ‘자유에의 길은 멀더라’ ‘사선 17개월 채규창 씨 귀환보고’ ‘허기져 쓰러지면 혹독한 매질’ 등의 기사를 실었다. 25일자 4면에서는 ‘구사일생의 비기(秘技) 태권도’ ‘박정환 소위는 이렇게 살아왔다’ 등의 후속 기사도 실렸다. 이후에는 ‘사선 500일-베트콩에 잡혀갔던 채규창 씨의 생환 수기’라는 특집 기획이 마련돼 귀국까지의 파란만장한 과정을 여러 번에 나눠 소개했다.

닉슨 대통령, 루마니아 전격 방문



닉슨 대통령의 루마니아 전격 방문 소식이 6월 30일자 1면에 자세히 소개됐다. 출처 동아일보 1969년 6월 30일자 1면

전세계가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으로 갈라져 첨예한 대립을 하던 이 시기 미국 닉슨 대통령의 과감한 외교 행보는 세계적인 이슈였다. 특히 북한과 대치하고 있으면서 베트남 참전 당사자인 국내 독자에게도 닉슨의 행보는 큰 관심의 대상이었다. 가장 눈길을 끈 사건은 닉슨 대통령의 루마니아 전격 방문이었다. 6월 30일자 1면 ‘닉슨, 루마니아 방문’ ‘닉슨의 아시아·루마니아 행차…협상의 시대 탐색’이라는 제목의 기사들은 이에 대해 자세히 소개했다.

“닉슨 미국 대통령은 월남전 후의 아시아 정책을 구상하기 위해 필리핀 인도네시아 태국 인도 파키스탄 등 5개국을 7월 하순 1주일에 걸쳐 순방한다. 그는 이 순방에 이어 소련 블럭 내에서 자주노선을 추구하고 있는 동유럽의 공산국가 루마니아를 방문할 예정이다.(중략)



7월 3일 4면에는 루마니아에 대한 소개와 이 나라를 이끄는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서기장의 성장과정을 실었다. 출처 동아일보 1969년 7월 3일자 4면
7월 23일 워싱턴을 떠날 닉슨 대통령은 우선 역사적인 달 방문을 마치고 돌아올 아폴로 11호의 착수(着水)를 목격하기 위해 태평양으로 비행할 것이며, 그 후 아시아 순방과 루마니아 방문 뒤 8월 3일 이전에 귀국할 것이다. (중략) 루마니아 방문은 2차 세계대전 중 루즈벨트 대통령의 ‘얄타 회담’ 참가와 트루먼 대통령의 ‘포츠담 회담’ 참가 이래 처음 있는 미국 대통령의 공산국가 방문이라 특히 주목을 끌고 있다.”

이 무렵 닉슨 대통령의 루마니아 방문이 갖는 의미를 짚어보는 분석 기사도 여럿 실렸다. 7월 3일자 ‘닉슨 루마니아 방문의 파장…자유노선의 가속’이란 기사는 ‘소련의 위협 견제’ ‘외교적 줄타기로 이익 노려’ 등의 제목을 달고 “동서의 대립과 공산권의 분열을 틈타 자주노선을 추구해 온 동구권의 이단아인 루마니아는 오는 8월초 예정된 미국 닉슨 대통령의 방문을 앞두고 이제 국제정치의 초점이 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같은 날 4면에는 ‘동구의 라틴 고도(孤島), 루마니아’라는 제목으로 루마니아에 대한 소개와 이 나라를 이끄는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서기장의 성장과정을 실었다.

“소련 다음으로 유럽에서 가장 풍부한 석유 및 전력을 등에 업고 1948년 이후 이룩한 연평균 23.2%라는 놀라운 경제성장은 국민경제구조와 사회구조를 근본적으로 변혁시켰다. 나아가 외교 정책에 있어서도 독자 노선을 추구하게 된 배경으로 지적된다.(중략) 차우셰스쿠는 줄곧 공산권 내에 ‘타국 내정 불간섭 원칙’을 내세우면서 중공과 소련의 분쟁을 이용, 루마니아의 국가 이익을 살려온 민족공산주의자로 평가받고 있다.”



1969년 8월 3일 루마니아의 민속박물관을 방문한 닉슨 대통령이 차우셰스쿠와 손을 잡고 루마니아 민속 무용단과 함께 춤을 추고 있다. 출처 동아일보 1969년 8월 4일자 2면
차우셰스쿠는 훗날 북한의 김일성과 의형제를 맺고 김일성 주석궁을 본떠 인민궁전을 짓는 등 북한 못지 않게 악명 높은 독재 왕국을 24년간 유지했다. 그 사이 루마니아는 유럽의 최빈국으로 전락했다. 1989년 12월 길거리에서 차우셰스쿠가 총살되는 장면은 전세계에 전파를 탔고 이는 동유럽 공산권 붕괴의 상징이 됐다.

닉슨이 루마니아를 방문한 8월 2일자 1면에는 ‘닉슨 오늘 루마니아 방문’ ‘차우셰스쿠와 두차례 회담’ 등이 톱 기사로 나왔다. 8월 4일자 2면에는 닉슨 대통령을 극진히 환대하는 루마니아 현지의 모습을 실었다. ‘열광, 닉슨의 공산국 착륙’ ‘성조기 물결’ ‘꽃다발 세례’ ‘길가에서 키스’ ‘아가씨와 호라춤도’ 등의 제목을 단 이 기사는 “루마니아 방문 이틀째인 3일 2시간 반 동안 부카레스트 시가지를 행진하면서 성조기의 물결과 환호성 속에 유례없이 열광적인 시민들의 환영을 받았다”고 보도했다.

닉슨, 중국에 화해 제스처…핑퐁 외교 출발점 만들어

이 무렵 미국은 중국에게도 화해 제스처를 취했다. 7월 24일자 ‘아폴로 이후의 미국과 중공’이라 사설은 이와 관련된 당시 국제 정세를 짚었다.

“닉슨 대통령은 공존의 시대를 외치고 협상의 시대를 역설하고 있었다. 아폴로 11호의 후광에 따른 힘의 우위와 승리의 외교 행각을 이처럼 맛본 사람은 없었다고 생각된다.

미국 정부는 최근 침묵을 깨뜨리고 대 중공정책의 일대 전환을 모색하고 있는 것 같다. 미국은 중공과의 사이에 그토록 싸여있는 장벽을 물리치고 대화의 길을 찾는다는 견지에서 일정량의 중공 상품 구매와 특정인의 중공 여행 제한을 철폐한다고 발표하였다. 이에 대한 중공의 반응은 극히 냉랭한 것으로 이미 나타나고 있지만, 그래도 미국 정부가 대화의 길에 선수를 쓰고 있다는 것은 그 나름대로 평가될만한 일이다.”

닉슨의 이같은 노력은 훗날 양국 간의 역사적인 ‘핑퐁외교’로 이어진다. 핑퐁외교는 1971년 4월 일본 나고야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중국 선수단이 미국 선수단을 자국에 공식 초청하면서 시작된다. 이를 수락한 미국 선수단 15명은 며칠 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최초로 중국을 방문하는 미국인이 된다. 이 일을 계기로 양국 사이 20년 이상 적대적이었던 관계가 개선되고, 1972년에는 닉슨 대통령과 마오쩌둥 주석의 정상회담까지 성사된다. 이같은 분위기는 1979년까지 이어져 마침내 미중 수교로 결실을 맺었다.

박 대통령 ‘3선 개헌’ 시도…전국 대학가 반대 시위로 혼란



개헌 반대 시위로 교문을 나와 경찰과 대치중인 고려대생들. 출처 동아일보 1969년 6월 27일자 3면

1969년 여름 국내 정치도 거센 변화의 소용돌이에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이른바 ‘3선 개헌’ 추진이 그 혼란의 중심이었다. 박 대통령은 1963년 제5대 대통령에, 1967년 6대 대통령에 취임했기 때문에 당시 헌법을 바꾸지 않으면 이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수 없었다. 박 대통령의 장기 독재를 우려한 대학생들은 6월말부터 한달 가까이 전국적인 개헌 반대 시위를 벌였다. 이 와중에 정부의 무리한 시위 진압은 언론의 도마 위에 오르기도 했다.

이 시기 동아일보에는 독자 투고를 통해 찬반토론을 펼치는 ‘조류(潮流)’라는 정기 코너가 있었다. 여기에 7월 10일자로 투고한 서울대 문리대 유민성 군의 ‘탄압만이 최선인가’라는 글은 당시 대학생들의 고뇌가 고스란히 담겨있는 듯하다.



휴강 공고가 나붙은 서울대 문리대 교문 앞에 대기중인 경찰관들. 출처 동아일보 1969년 7월 4일자 3면
“나는 왜 데모를 하는가. 나는 신념이 없이 행동하기는 싫다. 민주주의에 대한 나의 확고한 신념 때문에 거리로 뛰쳐나온다. (중략) 거리에서, 골목에서 어지러이 쫓기면서 나는 무력한 소시민인 우리들을 발견하다. 헬리콥터 소리가 요란하다. 간첩의 악랄한 침투를 막기 위해서 헬리콥터가 부족하다고 모든 국민은 없는 주머니를 털어 모았다. 그런데 그 귀하고 비싼 줄만 알았던 헬리콥터가 머리 위를 수없이 선회한다.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된 채 안개처럼 몽롱한 조국의 앞날을 본다.(중략)

우리는 학생이기 이전에 국민이며 우리들의 의사는 진지하게 공개적으로 검토되어지거나 최소한 그 발표만이라도 허용되어야 한다. 우리는 결코 우리들의 것인 정부의 적일 수가 없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토록 메마른 눈물을 뿌리며 추방되다시피 교문을 나와야만 하는가.“

7월 4일자 신문에는 경찰이 진압 도중 대학 교수와 신문 기자까지 폭행한 소식을 전했다. ‘교수에도 경찰봉’이라는 기사는 “4일 낮 12시 반경 서울 중랑교에서 데모 학생들을 귀교시키기 위해 학생들을 버스에 태우던 서울대 공대 일부 교수들이 경찰 곤봉에 맞아 부상을 당했다”고 보도했다.

또 ‘본사 기자에 폭행’이란 기사는 “4일 오전 11시 20분경 안암동 로터리 앞길에서 데모 취재를 하던 본사 사진부 심종완 기자가 고려대 통계학과 1학년 이유권 군이 경찰봉에 얻어맞으며 연행되어가던 것을 찍으려하자 경찰관들은 ‘너는 뭐냐?’면서 심 기자를 주먹으로 치고 무릎으로 차는 등 폭행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6월 27일부터 7월 11일까지는 연일 전국 대학의 시위 상황을 비중있게 다뤘다. 6월 27일자 ‘500여 고대생 개헌 반대 데모’라는 제목의 기사는 “27일 낮 12시 25분경 고려대 학생 700여 명은 동교 배구장에서 ‘민주헌정수호’ 성토대회를 연 후 그 중 500명이 두 번이나 교문 밖으로 뛰쳐나와 출동한 경찰과 대치, 경찰은 최루탄을 쏘아 이들을 교문 안으로 밀어넣는 사태가 발생했다”고 보도했다. ‘계명대 학생 400명 개헌반대 성토’라는 기사는 “이날 학생들은 개헌 절대반대 및 장기집권 지양과 부정부패 일소, 학원사찰을 중지하라는 내용의 선언문을 낭독한 후 해산했다”고 전했다.

6월 30일자에는 ‘2000여 高·延大生 개헌반대 거리로’ ‘경북대생들 거리 행진’이라는 기사가, 7월 4일자에는 ‘서울 시내 대학가 사실상 휴교’ ‘휴강…시험도 연기’ ‘교문서 등교 막기도’ ‘서울사대 임시 휴교’ ‘연대생 2명 즉결에 넘겨’ ‘길가던 학생 끌고가 뭇매’ ‘경찰 집계, 6일간 데모 참가 3만여 명’ ‘학생 500여 명 연행’ ‘학생 데모 일주일 째 단식 농성도’ ‘외국어대 철야 포위’ 등의 기사들이 실려 당시 혼란스러웠던 국내 정국을 짐작케 했다.



7월 30일자 1면 톱으로 실린 3선 개헌 관련 기사. 출처 동아일보 1969년 7월 30일자 1면
7월 7일자와 9일자 신문에도 ‘학술활동 아니고는 학생집회 일체 불허’ ‘각급 학교 전국 곳곳서 조기 방학…서울서만 7개 대학’ ‘가톨릭 의대생 100여 명 단식’ ‘조건부 단식에서 무기한 농성으로…개헌반대 경희대생’ 등의 기사들이 대학가 상황을 전했다. 정권의 무리한 개헌 추진은 전국 곳곳의 고등학생까지 거리로 나오게 했다. 7월 11일자에는 ‘안동고, 1000여 명 개헌반대 성토’ ‘대전고, 3일간 휴교’ ‘부산 동래고, 무기한 휴교’ 등의 기사가 실렸다.

아폴로 11호가 지구를 떠나 달을 향해 질주하던 7월 19일 서울대는 시위 참가 학생을 대거 징계하는 조치를 내렸다. 23일자 ‘처벌 각 단대 파급…문리대도 22명선’이라는 기사는 “서울대는 지난 19일 열린 교수회의에서 개헌 반대 데모를 주동한 사회학과 1학년 이철(21) 군을 제적했다”는 내용을 전했다.

이 기사에 등장하는 이철 군은 지난해까지 한국철도공사 사장을 지낸 전직 국회의원 이철 씨와 동일 인물이다. 이철 씨는 훗날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체제 시기였던 1974년 학생들의 수업거부와 집단 행동을 금지하는 긴급조치 4호가 발동되면서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으로 김지하 등과 함께 잡혀가 사형 선고를 받는다. 하지만 훗날 형 집행 정지를 받아 석방되고 정치인으로 변신해 1980년대 이후 3선 국회의원을 지냈다.

영화·잡지·소설, 음란성 이유로 탄압받기도



1969년 7월 서울지검은 음란성범죄 특별단속반을 가동해 소설 영화 잡지 관계자들을 소환해 조사했다. 출처 동아일보

이 시기는 지식인 뿐만 아니라 예술인에게도 숨이 턱턱 막히는 갑갑한 시절이었을 것이다. 아폴로 11호가 발사되던 7월 16일 서울지방검찰청에서는 ‘음란성범죄 특별단속반’이 가동중이었다. 16일자 ‘소설도 조사 착수’ ‘영화 두 편을 입건’이라는 기사는 아래와 같이 소식을 전했다.

“16일 오전 서울지검 음란성범죄 특별단속반은 월간지와 영화에 이어 일반소설 부문에 대한 수사에 나서 건국대 박승훈 교수의 ‘서울의 밤’ ‘영점하의 새끼들’ ‘영년구멍과 뱀과의 대화’와 염재만 씨 저작의 ‘반노’ 등 4편을 음란 문서로 단정, 음란 문서 등의 제조와 반포의 혐의로 입건, 소환했다. (중략) 염 씨의 ‘반노’는 변태적 부부의 성생활을 음란하게 묘사한 혐의를 받고 있다.”



1969년 7월 동아일보에 실린 극장 영화 광고. 출처 동아일보
“서울지검은 16일 극영화에 대한 입건대상을 재조정, ‘벽 속의 여자’ ‘내시’ 등 2편만을 입건하고 ‘너의 이름은 여자’에 대해서는 입건을 보류했다. 단속반은 15일 오후 ‘벽 속의 여자’의 박종호 감독, ‘너의 이름은 여자’의 이형표 감독 및 두 영화의 주연배우 문희, 김지미 양 등을 소환 심문했는데, 문 양과 김 양은 감독의 요청으로 선정적인 연기를 했다고 진술했다.

단속반은 ‘내시’를 제작한 신상옥 감독이 현재 일본을 방문중이므로 귀국하는대로 신 감독을 소환하기로 하고, 우선 이날 ‘내시’의 주연을 맡은 신성일 씨와 윤정희 양을 소환키로 했다.”

18일자는 후속 보도로 ‘남궁원 씨 등 심문’이라는 기사를 실었다.
“입건된 소설가 염재만 씨는 이날 ‘변태적 부부의 성을 그린 것은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성적 노예성을 파헤치고 이에 저항하는 인간의 초월된 자아를 찾기 위한 것’이라고 진술했다. (중략) 검찰은 지난 2주일간의 단속에서 아리랑 등 두 월간지와 극영화 2편, 소설 4편을 입건하고 월간지 편집 관계자 등 15명을 구속 기소했다.”

어린이에게 꿈을 줬던 아폴로 11호

1969년 여름은 이처럼 국내외적으로 격동기였지만, 정치에 무관심하거나 생업에 쫓겨 세상일에 관심 둘 여유가 없는 보통의 평범한 시민은 그 소용돌이에서 한 발치 비켜나 있는 듯 보인다. 6월 28일자 3면에 실린 ‘시원한 여름 풍물’이라는 화보 기사는 1969년 보통 사람들의 여름 풍경을 생생히 담아내기도 했다.



1969년 여름 풍경. 왼쪽부터 ‘서울행 열차를 기다리는 경북 성주 수박‘, ‘남산 분수대‘, ‘서울 YMCA 실내 풀장‘, ‘경기도 고삼 저수지‘. 출처 동아일보 1969년 6월 28일자 3면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이에게는 사람이 달 위를 걸었던 그 해 여름은 평생 잊기 힘든 추억이었다. 당시 흑백 TV로 접한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 광경은 수많은 어린이에게 영감을 주었다.

‘하늘을 나는 자동차’ 프로젝트의 연구 책임을 맡고 있는 이대성(53) 한국항공우주연구원 항공연구본부장, 미 항공우주국(NASA)의 항공연구 부문 최고책임자(차관급)인 신재원(50) 국장보, 우주관측위성 ‘갤렉스’를 이용해 은하 자외선 촬영에 세계 최초로 성공한 이영욱(48) 연세대 천문우주학과 교수, 국내 최초로 무인 달탐사용 소형 착륙선을 개발한 권세진 KAIST 항공우주공학과 교수 등은 어린 시절 TV로 지켜본 달 착륙이 훗날 과학자의 꿈을 키우는 결정적인 계기였다고 말한다.

이는 해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미국 우주왕복선 디스커버리호의 마크 폴란스키(53) 선장은 13세 때, 국제우주정거장(ISS)의 페기 윗슨(49) 선장은 9살 때 TV 중계를 통해 달 탐사를 목격하고 우주인의 꿈을 키웠다고 밝혔다.

그해 여름 그들은 어디서 달 착륙을 지켜봤을까



1969년 당시 164세의 노인 치탈리 미슨리모프. 출처 동아일보 1969년 7월 11일자 4면
7월 11일자 4면에는 웬만해선 믿기 힘든 해외 뉴스가 실렸다.
“소련의 아제르바이잔 공화국에 살고 있다는 올해 164세의 노인 치탈리 미슨리모프. 1805년에 태어난 그는 영국의 넬슨 제독이 프랑스 해군을 무찌른 트라팔가 해전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는데 그의 장수 비결은 산책을 즐기고 뜰에서 일하면서 조용한 생활을 하는데 있다고 말했다.”

이밖에도 7월 23일과 24일자 신문에는 달 탐사와 관련해 흥미있는 기사들이 여럿 실렸다. ‘두 죄수 탈옥 성공’이란 제목의 기사는 “미시간 주 밀란 연방형무소의 죄수 6명은 아폴로 비행사들의 착륙 광경을 TV로 시청하는 도중 탈출을 기도해 4명은 감옥 안에서 잡히고 2명은 벽을 넘어 도주했다”는 영화 속에서나 볼 법한 황당한 소식을 보도했다.

‘TV 안보고 극장 가’라는 제목의 기사는 “태국 방콕에서는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 광경을 집에 가서 TV로 보라고 10개 중고교가 지난 21일 휴교했지만 TV 보러 귀가하는 학생보다 바(bar)나 극장으로 줄달음치는 학생이 더 많았다”며 “뜻한 바를 달성하지 못한 학교 당국은 빗나가는 학생을 바로잡아줄 겸 금주 주말에 보충수업을 하기로 결정했다”고 전했다.

1969년 여름 세계 곳곳의 평범한 시민들은 각자가 처한 다양한 상황에서 제각각의 모습으로 우주로 잠시 눈을 돌렸을 것이다. 런던과 도쿄, 방콕, 파리, 바르샤바 시민들은 TV에서 혹은 광장에서 닐 암스트롱의 걸음걸이를 숨죽이며 지켜봤다.



1969년 당시 보급됐던 TV 수상기의 일반적인 모양. 출처 동아일보
그해 여름 중국의 북경 시민들, 국경분쟁 전투에 내몰렸던 소련과 중국 병사, 수에즈 운하를 사이에 두고 치열한 전투를 벌인 이스라엘과 이집트 군인, 베트남의 밀림에서 목숨 걸고 싸운 우리 국군들과 적(敵)이었던 베트남 병사들. 그들은 인간의 달 착륙을 제대로 볼 수나 있었을까.

닉슨 대통령과 춤을 췄던 루마니아 아가씨, 19세기 초반부터 온갖 역사적 사건을 보고 들었을 미슨리모프 씨, 베트남 군 포로로 잡혔다 태권도로 탈출한 박정환 소위, 음란성 판정으로 심기가 괴로웠을 ‘반노’의 염재만 작가, 아폴로 11호가 발사된 날 검찰에 소환된 영화배우 문희 씨와 김지미 씨, 3선 개헌 반대를 외쳤던 서울대 유민성 군과 학교에서 쫓겨난 이철 군.

1969년 7월 21일 이들은 각자 어디서, 어떤 느낌으로 인간이 달을 밟는 광경을 바라봤을까. 그해 여름 인간의 달 정복은 그들 가슴 속에 어떤 의미로 다가갔을까.

서영표 동아사이언스 기자 sypyo@donga.com

[백투더 1969②]아폴로 11호가 남긴 잊혀진 이야기들 과학

[백투더 1969②]아폴로 11호가 남긴 잊혀진 이야기들

인류 최초 달 정복을 둘러싼 말·말·말

2009년 08월 13일

1969년 7월 아폴로 11호의 달 정복은 지역과 인종, 이념을 떠나 전 세계를 감격과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대사건이었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었다.

인류 최초로 달에 상륙한지 40년이 지난 지금 본지는 그 때의 감동을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해 그 시기에 나온 신문(新聞)을 살펴봤다. 당시 일반 대중들이 달 탐사에 보였던 관심과 환호는 언론이 얼마나 이를 비중 있게 다뤘는지를 통해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에 1969년 6월 18일부터 8월 18일까지 동아일보에 보도된 아폴로 11호 관련 기사를 근거로 ‘백투더(Back to the) 1969’ 시리즈를 마련했다.

제1편 21일 2시 56분 20초 “인간 달에 섰다”
제2편 아폴로 11호가 남긴 잊혀진 이야기들
제3편 그해 여름 당신은 어디서 무엇을 했나



아폴로 11호가 발사된 1969년 7월 16일. 이날은 전세계 모든 사람에게 축제의 시간이었을까. 100만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몰린 케이프케네디 발사기지 한 켠에선 달 탐사계획을 반대하는 규탄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 흑인 인권단체들이 몇 날 며칠을 이곳까지 행진하며 그렇게 목놓아 소리쳤던 주장은 무엇이었을까.

한편 뉴욕타임스는 발사 다음날인 17일 1920년에 있었던 일에 대해 공식 사과하는 정정기사를 싣기도 했다. 뉴욕타임스는 49년 전 과연 무슨 잘못을 저질렀던 것일까. 또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을 정확히 예언한 인도의 점술가 다디 발사라는 아폴로 11호 발사에 앞서 또 한 차례 예언을 해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그의 예언은 과연 제대로 들어 맞았을까.



아폴로 11호의 우주인들이 인류 최초로 달을 밟은 다음날인 1969년 7월 22일. 당시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백악관을 방문한 1000여명의 외국 고교생들과 이야기를 주고 받고 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서기 2000년이 되기 전에 사람들은 새로운 행성을 방문하게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출처 동아일보 1969년 7월 23일 1면

정체불명 蘇 루나 15호 발사…아폴로 앞서 달 지질표본 채취 임무

1969년 여름 아폴로 11호는 다양한 곳에서 수많은 이야기를 남겼다. 그 가운데 가장 흥미있는 소재 중 하나는 이 무렵 느닷없이 등장한 소련의 무인 달 착륙선 ‘루나 15호’였다. 끝까지 미스테리한 존재로 아폴로 11호 주변을 맴돌았던 루나 15호는 닐 암스트롱과 에드윈 앨드린이 달을 밟은 21일까지 극적인 긴장감을 높여주는 감초 역할을 톡톡히 했다.

이 시기 동아일보도 여러 차례 루나 15호에 관해 비중있게 보도했다. 냉전의 상징인 미국과 소련, 두 우주 강국의 첨예한 경쟁 구도에서 나오는 또 하나의 흥미 요소를 적극 끌어들인 것이다.

7월 3일자 2면 ‘蘇, 무인달착륙선 계획’은 루나 15호의 존재를 알리는 첫 기사였다. 이 기사는 “소련은 오는 10일 미국의 달 착륙선 아폴로 11호의 발사예정을 일주일 앞질러 무인 달 탐색선을 발사, 달의 토양 샘플을 채취해 지구로 회송할 계획이라고 2일 발표했다”며 “만약 이번 발사가 성공한다면 미국의 아폴로 11호 발사의 선전 효과를 크게 감소시키게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루나 15호가 발사된 다음날인 14일부터 19일까지 거의 매일 1면에 루나 15호에 관한 소식이 비중있게 다뤄졌다. 출처 동아일보 1969년 7월 14일 1면

루나 15호가 발사된 다음날인 14일부터 19일까지는 거의 매일 1면에 루나 15호에 관한 소식이 비중있게 다뤄졌다. 14일자 1면 ‘蘇, 루나 15호 발사…16일 도착 지질표본 갖고 귀환설’이란 기사는 아래와 같이 보도했다.

“소련은 13일 미국의 아폴로 11호 달착륙우주선 발사를 3일 앞두고 로봇에 의한 달 표면 지질 표본 채취와 지구 귀환을 목적으로 하는 것으로 보이는 무인달우주선 ‘루나 15호’를 발사했다. 루나 15호는 13일 오전 5시 55분에 발사되어 예정된 항로로 달에 접근하고 있으며 지상과 우주선 사이에 만족스러운 무선통신 연락이 이루어졌다고 모스크바 방송이 보도했다.

과학 전문가들은 루나 15호가 달에 착륙하여 달 표면 지질 표본을 채취해 가지고 다시 지구로 돌아오려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밝혔다. 이 계획이 성공한다면 소련 우주과학자들은 소련의 달 탐사계획은 본래 미국의 아폴로 계획처럼 인간을 달에 올려놓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동장치’로 달 성분의 과학 조사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다시 확인해주는 셈이다.“

같은 면 또 다른 기사는 아폴로 11호와 루나 15호가 달에서 서로 만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언급했다. 이 기사는 “서독의 보쿰연구소 하인츠 카민스키 소장은 무인 달 우주선 루나 15호가 만약 달의 밝은 면에 착륙한다면, 미국이 16일 발사 예정인 아폴로 11호가 머물 예정 장소에 착륙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미국의 달 정복 효과 훼방 목적?…루나 15호 달 연착륙 실패



미국과 소련의 로켓 개발 현황 비교 그림. 루나 15호의 등장은 아폴로 11호의 달 탐사 보도를 더욱 흥미진진하게 했다. 두 우주 강국의 첨예한 경쟁 구도는 또 하나의 관전 요소였다. 출처 동아일보 7월 17일 4면

루나 15호의 진짜 의도에 대해서는 당시 명확히 파악되지 못한 채 갖가지 설왕설래를 남겼다. 15일자 1면 ‘루나15 달 향해 항진’이란 기사는 “소련 무인달우주선 루나 15호는 14일 달까지 거리의 거의 중간지점을 통과했다”며 “16일 아폴로 11호가 발사될 무렵 달에 도착할 것으로 보이지만 소련은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다”고 전했다.

같은 날 2면에서는 루나 15호가 발사된 배경에 대한 분석 기사가 실렸다. ‘蘇 무인우주선 루나 15호의 임무’라는 기사는 “달에 착륙한 뒤 암석을 갖고 지구로 돌아와 미국의 유인 달 정복이 갖는 충격적인 성과를 반감(半減)하려는 시도라는 추측이 일고 있다”고 배경을 짚었다.

“우주개발의 초기에서부터 소련은 달 로케트 분야에서도 줄곧 미국을 앞질러왔다. 1959년 10월 달에 명중한 루나 2호를 비롯해 달 뒷면 촬영 성공 등을 거쳐 1968년 9월 존드 5호의 무인 달궤도 비행으로 언제나 선수를 쳐서 미국에 앞서 유인 달 정복을 이룩할 기세였다.(중략)

루나 15호는 아폴로 11호가 발사되는 16일 달에 도달한다. 그 정체는 무엇일까. 21일 새벽으로 다가선 미국의 달 정복을 앞두고 가장 알맞은 시기에 변칙적으로 이 경쟁에 뛰어든 루나 15호는 달 정복에 또 다른 화제를 던져주고 있다.“



루나 15호의 향방을 비중있게 다뤘던 동아일보 기사들. 출처 동아일보
아폴로 11호가 성공적으로 발사된 다음날인 17일 루나 15호는 달 궤도 진입에 성공했다. 18일자 1면 ‘루나 달 궤도진입…도착 뒤 흙 파 돌아올 듯’이란 기사는 이 소식을 자세히 전했다.

“소련 관영 타스 통신은 17일 오후 7시(한국시간) 루나 15호가 달 궤도에 진입했다고 보도했다. 모스크바의 과학 소식통들은 루나 15호가 달 궤도에 진입한 때로부터 24시간 안에 달 표면에 착륙해 달 표토 표면을 채취한 다음 아폴로 11호보다 이틀 먼저 지구로 귀환할 것이라고 말했다. 영국 조드렐뱅크 천문관측소 로벨 소장은 ‘루나 15호가 달 착륙에 앞서 방향조정 기술과 달 궤도 직경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루나 15호가 방대한 양의 정보와 포괄적인 자료를 보내오고 있으나 아직 사진은 전송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다음날인 19일자 1면에 실린 ‘루나, 달 비행 계속’이란 기사는 “비밀에 싸여있는 소련의 루나 15호는 지구와의 교신을 계속하면서도 앞으로의 계획을 전혀 밝히지 않은 채 달 상공 96km의 궤도를 계속 돌고 있다”며 “아폴로 11호가 달에 도착할 때 이를 감시 관측하기 위해 앞으로도 계속 달 궤도를 선회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전했다.

아폴로 11호가 달 착륙에 성공한 21일에도 루나 15호에 관한 소식은 이어졌다. ‘루나 15 곧 달 착륙’이란 기사는 “비밀에 싸인 채 4일째 달 궤도를 돌고 있는 소련의 루나 15호가 20일 38번째 달 궤도 비행을 마친 후 돌연 두 번이나 궤도를 수정, 아폴로 11호의 착륙지 근처 달 표면 16km 상공까지 내려갔다”며 “곧 달에 착륙하거나 아폴로 11호의 임무를 정찰하게 될 것으로 나타났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루나 15호의 조연 역할은 거기까지였다. 다음날인 22일자 2면에서는 루나 15호가 21일 달에 연착륙하는데 실패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 기사는 “소련 관영 타스 통신이 ‘루나 15호의 우주탐색 계획이 끝났다’고 발표했는데 달 탐색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임무 수행에 실패했음을 시인하는 것”이라며 “영국 조드렐뱅크 천문관측소의 과학자들도 ‘루나 15호가 달 암석 견본을 채취하려던 임무에 이미 실패한듯 하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한편에서는 美·蘇 우호 분위기 연출…우주정거장 공동 탑승 언급

동서 냉전시대를 대표하는 최강국 미국과 소련은 이처럼 치열한 경쟁을 벌였지만 한편으로는 서로 우호적인 분위기도 연출했다. 아폴로 11호 발사를 며칠 앞두고 미국 아폴로 8호 우주인 프랭크 보맨 대령이 소련 모스크바를 방문해 소련 우주인들에게 열렬한 환영을 받기도 했다. 4일자 2면 ‘내년 우주정차장엔 미국 소련인 공동 승선’과 11일자 1면 ‘달 착륙 성공 빌어’, 25일자 2면 ‘소련, 회수 광경 TV…닉슨에 축전도’ 등의 기사들은 아래와 같이 분위기를 전했다.



미국 아폴로 8호 우주인 프랭크 보맨이 2일 소련 모스크바에 도착, 환영 꽃다발을 들고 있다. 출처 동아일보 1969년 7월 3일 2면
“미 우주인 프랭크 보맨은 3일 미국이 오는 1970년대 중반기에 거대한 우주정차장을 발사할 계획을 추진중에 있다고 밝히고 ‘이 계획에서 미국과 소련 우주인들이 공동 승선하게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고 말했다. 소련 방문의 일환으로 레닌그라드에 들른 보맨은 이날 비공식 기자회견을 통해 이같이 밝히고 자기가 직접 참여하고 있는 이 계획의 상세한 내용에 관해서는 언급을 회피했다.”

“소련연방최고회의의장 포드고르니는 9일 이곳을 방문중인 미국 우주비행사 프랭크 보맨 대령을 만나 아폴로 11호 우주비행사들의 성공을 빈다고 말했다.”

“소련의 모스크바 TV 방송국은 24일 밤 미국의 아폴로 11호 우주선의 지구 귀환 광경을 소련 국민들에게 생방송으로 중계하고 닉슨 대통령에게 축전을 보냈다.”

1969년 미국과 소련의 우주탐사 전쟁은 결국 미국의 승리로 끝났다. 닉슨 대통령은 이를 자축하겠다는 듯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한 25일을 임시 공휴일로 지정했다. 17일자 ‘닉슨, 달 착륙 21일 공휴일 선포’라는 기사는 “닉슨 미국 대통령은 16일 아폴로 11호의 두 우주인이 인류사상 처음으로 달에 발을 딛게 될 오는 21일을 경축을 위한 공휴일로 선포했다”며 “이 날을 ‘국민참여의 날’로써 공휴일로 선포하고 각 주 및 시 당국에 이에 호응할 것을 호소했다”고 전했다.

흑인 단체, 발사기지까지 빈민(貧民) 행진…뉴욕타임스, “49년전 사설 사과한다”

하지만 미국내에서는 이처럼 박수와 환호로 넘쳐나는 축제 분위기만 있었던 건 아니다. 한편에서는 달 탐사에 쏟아부은 천문학적 비용에 대해 우려하는 비판 여론도 만만치 않았다. 26일자 4면 ‘6조원으로 쌓은 과학의 피라밋’이란 기사는 달 탐사 계획에 대해 “미국이 8년 동안 240억 달러(약 6조원)를 들이고, 2만개 민간 회사에 소속된 40만명의 작업으로 이루어진 현대판 피라밋”이라고 전했다.



흑인 인권운동가 에버나디 목사 및 윌리엄즈가 이끄는 데모대가 15일 케네디 발사장에서 아폴로 11호 발사 반대를 주장하고 있다. 출처 동아일보 1969년 7월 16일 2면
비판 여론이 조직적인 행동으로 나타난 건 흑인 인권운동가들의 항의 시위였다. 12일자 2면 ‘발사에 관객 100만명, 흑인 민생고 항의도’라는 기사는 “공항에 모여든 자동차의 물결 가운데는 흑인들의 민생고를 외면한 채 값비싼 예산을 들여 달로 가는 정부의 처사에 항의하는 흑인 민권단체의 노새 마차도 등장했다”고 보도했다.

15일자 2면 ‘지상의 빈곤 항의, 흑인들 빈민행진’이란 기사는 “케이프케네디(아폴로 11호 발사 장소)에 몰려드는 사람들 가운데는 아폴로 11호의 달 탐사를 축하하는 것이 아니라 항의하러 오는 사람도 있다”며 “암살된 마틴 루터 킹 박사의 뜻을 받들어 ‘빈민의 행진’을 계속하고 있는 애버나디 목사의 영도 하의 흑인들은 발사 시간에 맞추어 우주센터까지 행진을 계속하고 있다”고 전했다.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으로 축제 분위기가 최고조였던 22일에도 아래와 같은 기사가 실렸다.

“무엇 때문에 우주 탐색을 서둘러야 하는냐는 항의의 소리는 오래 전부터 계속돼 왔지만 아폴로 11호의 달 탐색이 성공한 직후에도 꾸준히 계속되고 있다. 흑인 시민에게도 경제적 정치적 평등권을 보장하라는 민권 투쟁의 지도자인 찰스 에버스 씨는 ‘어린이들의 식량 부족을 희생 삼아 아폴로 달 탐사를 계획할 필요는 없었다’고 주장했다. 흑인 시인 준 조르단 여사는 ‘공휴일이 아니라 성스러운 날로 정했어야 했다. 여러분들은 헐벗고 울부짖는 어린이들의 목소리가 담에서 들려오는 것을 들어봤습니까’라고 말했다.”



교황 바오로 6세가 그의 여름 휴양지인 교황천문대에서 고성능 망원경을 통해 아폴로 11호가 착륙한 지점을 관측하고 있다. 출처 동아일보 1969년 7월 21일 2면
해외에서도 이와 유사한 비판여론을 보였다. 16일자 2면의 한 기사는 프랑스에서 실시된 여론조사 결과를 소개하며 “프랑스 국민의 50%는 달 정복이 막대한 비용을 정당화시킬 만큼 가치있는 일이 아니라는 견해를 보이고 있다”고 보도했다.

교황 바오로 6세도 미국의 달 착륙 성공을 축하하면서도 천문학적 비용 경쟁에 대해 우려의 시각을 내비쳤다. 21일자 2면에 실린 한 기사는 “지상의 전쟁과 기아 문제가 외계의 정복 과정에서 소외되어서는 안될 것”이라며 “우주를 정복하기 위한 인간 지혜의 승리인 이 역사적인 날, 우리들은 인간이 필요로 하는 것과 우리 자신을 극복해야 하는 사명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내용의 교황 바오로 6세의 반응을 전했다.

뉴욕타임스도 아폴로 11호의 달 정복에 마냥 기뻐하지 못했던 이들 중 하나였다. ‘로켓의 아버지’로 불리는 로버트 고다드 박사가 1919년 ‘극한 고도에 도달하는 기술’이란 논문에서 로켓이 달까지 갈 수 있다고 주장한 내용을 두고 사설을 통해 조롱했던 전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뉴욕타임스는 1920년 1월 13일자 사설에서 “고교생 수준 이하의 지식으로 논문을 썼다”며 “공기가 없는 진공에서는 로켓의 우주비행은 불가능하다”고 혹평한 바 있다.

하지만 뉴욕타임스는 아폴로 11호가 우주로 발사된 다음날인 7월 17일자 ‘A Correction’이라는 기사를 통해 “오늘날 로켓 추진이 대기에서 뿐만 아니라 진공상태에서도 가능하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라며 “고다드 박사의 주장을 비난한 실수에 대해 깊이 사과한다”고 반세기만에 정정보도를 내야만 했다.

NASA 국장, “1980년대에 화성 갔다가 금성 돌아 지구로 귀환”

이처럼 과거에는 과학자의 공상과학소설 같은 주장들이 때로는 한낱 황당한 이야기로 취급받기도 했지만, 인간이 달 위를 걷는 광경이 눈 앞에 펼쳐진 1969년 당시에는 더 이상 상상하지 못할 일이 없는 듯 했다. 대표적으로 미 항공우주국(NASA) 토마슨 페인 국장은 전문가로서 여러 차례 장밋빛 미래를 예견하기도 했다. 7월 19일자 2면에는 ‘누구든지 달에 갈 수 있다’라는 제목으로 페인 국장의 주장을 실었다.



미 항공우주국(NASA) 토마슨 페인 국장은 1980년대에 달 여행과 화성 착륙이 가능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출처 동아일보 1969년 7월 19일 2면
“달 궤도를 도는 우주정거장과 지구를 왕복하는 장거리 원자력 로켓의 정기편이 생기면 달 여행 운임은 1984년 무렵 1만 달러 수준이 될 것이다. 이는 1960년대 처음으로 인간을 달에 보내기 위해 설계하고 제작한 아폴로 우주선의 도전에 비하면 그리 대단한 것은 못된다. 사실 충분한 현금만 확보되면 NASA는 미국의 각종 산업이나 대학과 협력해서 이 임무를 완수하게 될 것이다.

이 시기 달 표면에는 지상 기지가 건설될 것이다. 어떤 기지가 되는냐는 달에서 이용할 수 있는 어떤 자원이 발견되느냐에 달린 것이어서 아직 확신을 갖고 예언할 수는 없다. 세월이 지나면 기술의 진보는 태양 에너지나 원자력으로 달의 자원에서 건설 자재를 만들 수 있을 것이고, 달 표면 기지는 돔으로 만든 훌륭한 도시로 발전하게 될 것이 틀림없다.(중략)

거기에 사는 사람들은 지구에 있을 때보다 6배나 강한 체력을 갖게 되고 자기 자신의 근육의 힘으로 문자 그대로 하늘을 나는 운동선수처럼 지금까지 상상할 수 없었던 새로운 활동분야도 열릴 것이다.(중략) 아폴로 11호의 진정한 의미는 인류가 새로운 세계를 개척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언젠가는 거기에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는 것을 실증한데 있다고 할 수 있다.“

페인 국장은 8월 1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한 회의에서도 또 한번 미래를 예견하는 연설을 했다. 8월 4일자 2면 ‘82년 8월 9일 화성에 인간 착륙’이란 기사는 아래와 같이 연설 내용을 요약했다.

“NASA의 토마스 페인 국장은 1일 장차의 우주개발 전망을 설명하면서 예상되는 스케줄을 제시하고, 핵추진 유인우주선이 1981년 12월 지구를 떠나 1982년 8월 9일 화성에 착륙했다가 1983년에 금성을 돌아 그해 8월 14일 지구로 돌아올 것이라고 말했다. 1981년 11월 12일에 지구와 화성은 우주여행에 가장 편리한 우주의 좌표에 머물게 된다고 설명했다.”

닉슨, “2000년 다른 행성에 인간 살 것”…케네디 업적 가로챈다며 곱지않은 시선도

이같은 장밋빛 미래 예언에 닉슨 대통령도 가세했다. 그는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 다음날인 7월 22일 “2000년까지는 지구의 인간들이 생명체가 있는 새로운 세계에서 살고 있을 것”이라며 “그것이 화성일지 금성일지 또는 그 밖에 어떤 천체일지는 누구도 말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미국 닉슨 대통령은 21일 자신의 집무실에서 달에 도착한 우주인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다. 그는 "이 전화는 가장 역사적인 전화" "인류의 역사에 있어 이 위대한 순간" 등의 축하의 말을 건넸다. 출처 동아일보 1969년 7월 21일 2면
23일자 1면에 게재된 이 기사는 닉슨 대통령이 백악관을 방문한 1000여 명의 외국 고교생에게 이같은 내용의 연설을 했다면서 모든 국가가 미국의 우주개발계획에 협조하도록 호소했다고 보도했다.

이처럼 미국의 우주개발을 적극 지지하는 듯 보이는 닉슨에 대해 일부 곱지 않은 시선도 존재했다. 8월 7일자 2면 ‘닉슨, 아폴로 영광 독점’ ‘선거공약에선 때리더니 케네디 업적 가로채’라는 기사는 아래와 같이 뒷이야기를 전했다.

“대통령 선거 때는 물론 달 정복 계획을 내려치는데 늘 열을 올리던 닉슨 대통령이 아폴로 11호 성공의 추진력을 등에 업은 채 루마니아를 방문하는 성과까지 이루게 됐다.

(중략) 1970년까지 달 정복을 미국의 국책 과제로 결정한(1961년 5월 25일) 케네디 대통령에 경의를 표하는 뜻에서 NASA 측은 우주인이 달에 착륙하는 즉시 케네디 대통령의 5월 25일자 연설을 낭독하기로 계획했다.

그러나 착륙선을 ‘더 존 F. 케네디’로 명명하려던 결정마저 뒤엎고 ‘이글(독수리)’로 부르라고 지시한 닉슨 대통령은 케네디 연설문 낭독에도 제동을 걸었다. 그래서 닉슨 대통령이 달에 착륙한 우주인에게 전화를 하겠다고 요청했을 때 NASA 관리들은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투덜거리기까지 했다. 대통령과 우주인의 대화 시간을 2분 30초로 제한한 이면에는 그런 비화도 있다.“

예언가들, 아폴로 실패 예언…“달 착륙하면 외계인 보복할수도”

미래에 대한 예측은 꼭 전문가들만의 몫은 아니다. 7월 11일자 4면에는 “인디언 1만 5000여 명이 몰려살고 있는 캐나다 브랜포드 부근의 롱하우스 촌장 조셉 로간 씨는 아폴로 11호의 우주인들이 이번 달 착륙 시도에 실패할 것이라고 예언했다”는 짤막한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케네디 대통령의 죽음을 정확히 예언해 이름이 알려진 인도 점술가 다디 발사라도 달 탐사에 앞서 예언을 했다. 그는 이전에도 영국 윈스턴 처칠, 인도의 자하라할 네루, 인류 최초로 우주여행에 성공한 유리 가가린의 죽음, 수카르노 인도네시아 대통령의 실각을 예언한 바 있다. 그는 6월 20일 마치 루나 15호의 출현을 예견하는 듯 “미국의 달 착륙이 연기되고 소련이 먼저 달에 도달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하지만 결과는 틀렸다.

그는 이 예언을 하면서 닉슨 대통령, 월남전, 케네디 대통령의 동생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 케네디 대통령의 부인 재클린 오나시스, 3차세계대전 등에 관해서도 자신의 생각을 쏟아냈지만 모두 틀린 예언이었다. 그가 단 하나 맞힌 건 “소련, 동유럽 등 공산권이 1980년대에 마침내 내부 분열로 와해될 것”이라는 예언이었다.



정부에서 발행한 달소유 부동산증서로 ‘달은 내 것’이라고 주장한 칠레의 한 변호사에 대한 이야기가 상세히 소개됐다. 출처 동아일보 1969년 7월 5일 2면
미국의 달 정복이 세계적인 이슈였다는 점을 반영하는 듯 이 무렵에는 세계 곳곳에서 아폴로 11호를 둘러싼 황당한 주장들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 신문에 소개된 여러 가십성 뉴스 중 ‘인간이 달에 착륙하면 외계인이 보복할 것’이라는 기사가 눈길을 끌었다.

7월 5일자 2면에 게재된 이 기사는 “정체불명의 비행물체(UFO)에 관한 정보를 교환하고 있는 단체의 거두인 티모시 그린 베크린 씨는 만약 인간이 달을 식민지화하려 든다면 외계인들은 지구의 인간들이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훼방을 놓기 위해 달을 기지로 사용하기 시작할 것”이라며 “UFO에 관한 수 권의 책을 저술한 한 전문가는 이미 달 위에 설치된 외계인 조직체와 통신 연락을 해온 사람들로부터 이러한 정보를 입수했다”는 내용을 담았다.

정부에서 발행한 달소유 부동산증서를 갖고 ‘달은 내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등장했다. 칠레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는 이 남자는 “동서남북으로 직경 1만 km에 달하는 달의 지역에 대한 소유권이 있다”며 “칠레와 외교 관계를 맺고 있는 나라는 모두 나의 달 소유권을 존중해야 하고, 그것은 국제 사법의 일부”라고 주장했다. 7월 16일자 2면에서는 그의 주장을 상세히 소개했다.

“변호사이자 시인인 헤나로 카하르도 베라 씨는 칠레 정부 부동산국이 발행한 부동산증서를 증거물로 제시하고 있다. 그는 미국 아폴로 11호의 비행사들이 달에 착륙하면 닐 암스트롱 대령에게 ‘난 귀하가 나의 소유지에 도착하여 기쁘다’는 전문까지 보내 달 소유자 행세를 톡톡히 할 작정으로 있다.

베라 씨가 달의 소유권을 주장하는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데 이야기는 우주 탐색이 아직 시작되지 않았던 16년 전인 1953년에 소급한다. 칠레 법률은 누구든 주인이 없는 재물에 대해선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나는 이 부동산소유권 주장론을 시험해 보려고 달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서류를 작성, 이 사실을 칠레 신문에 연 3일간 광고하여 나의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나타나기를 규정에 따라 30일간 기다렸다’고 베라 씨는 경위를 설명했다.

그러나 30일이 지나도록 그 외에 달의 소유를 주장하는 사람이 안 나타나 칠레 남부 탈카 시 부동산국은 1953년 10월에 달 소유 부동산증서를 발급하는 동시에 세금으로써 1달러에 해당하는 액수까지 부과했다.”

7월 16일자 2면에서는 닉슨 대통령에게 100만 달러를 배상하라고 주장하는 네로 갈리라는 이름을 가진 이탈리아 화가를 소개했다. 그는 “미국 NASA가 내가 그린 우주비행체의 모양을 그대로 모방해서 아폴로 11호의 형태를 만들었다”며 “그림을 무단 도용한 책임을 물어 미국의 닉슨 대통령을 상대로 100만 달러의 손해배상을 청구하겠다“고 주장했다.

“인간의 발이 달을 더럽혀도”…“민족주의 청산 기회”

인류 사상 최초로 인간이 달을 밟은 광경을 목격한 예술가들은 당시 어떤 상념에 빠졌을까. 동아일보는 7월 14일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영화배우 가수 시인 소설가 등 예술가들의 반응을 소개하기도 했다.



7월 19일자 1면에 실린 영국의 역사학자 아널드 조지프 토인비의 글. 출처 동아일보 1969년 7월 19일 1면
‘안달루시아의 개’ ‘황금시대’ 등의 작품으로 유명한 스페인의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는 “달에서 그들이 무엇을 발견하든 나는 관심없다”면서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인간의 동면(冬眠)에 관한 연구인데 아폴로 11호가 그 연구를 촉진시켜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1950~1960년대 세계적인 여배우였던 소피아 로렌은 “비록 그것은 거창한 사업이기는 하지만 그처럼 엄청난 돈을 소비해야할만큼 가치가 있는 것인지 의심스럽다”며 “나의 세대에는 달로 여행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으나 내 아들 카를로는 주말에 마음대로 달로 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동시대 최고의 섹시 심볼로 활동하던 프랑스 여배우 브리지트 바르도도 소감을 밝혔다. 우리에게는 2002년 월드컵 당시 한국의 개고기 문화를 비방해 물의를 일으킨 배우로 잘 알려져 있다. 그녀는 “로케트를 타고 달에 갈 생각은 없다”면서 “나는 이 지구도 아직 잘 모른다”는 간략한 말을 남겼다.

샹송 가수이면서 할리우드 스타 배우로 활약한 프랑스의 모리스 슈발리에는 “인간이 달에 착륙함으로써 달의 빛은 꺼진다”며 “그것은 달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시인들에게 극적인 손실을 가져다 줄 것”이라며 착잡해했다.

장편소설 ‘대지(The Good Earth)’로 유명한 노벨문학상 수상자 펄 벅은 “인간은 끝없이 미지를 밝히려는 동물이다. 만일 인간이 지구상에서 지구 이상의 것을 찾지 않는 날이 오면 그때에는 지구도 죽어버릴 것이다. 인간의 발이 달을 더렵혀도 나는 언제나 달과 더불어 공상할 것이다”라는 복잡한 심경을 밝혔다.

7월 19일자 1면에는 영국의 역사학자 아널드 조지프 토인비의 글이 실렸다. 토인비는 대석학다운 시각으로 아폴로 11호의 달 정복 계획이 갖는 의미를 차분히 짚어냈다. 그는 지구에서 벌어지는 모든 분쟁의 근본 원인 중 하나로 민족주의를 꼽으며,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이 가져다 줄 인류 전체의 연대감으로 민족주의를 넘어서자는 주장을 펼쳤다.

“아폴로의 달 탐사는 ‘민족주의’라는 시대착오적인 고정관념을 청산할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달 탐사가 윤리적으로 정당화되려면 전쟁 폐기와 관련된 경우라야 한다. 인류의 대다수가 아직도 절망적인 정도의 의식주에 쪼들리고 있다. 만약 지금까지 지구에서 습성화된 버릇대로 달 탐사를 생각한다면, 훗날 달 탐사 계획은 피라미드나 앙코르와트, 루이 14세의 베르샤유 궁전과 같은 ‘낭비’의 하나로 기억될 것이다.”

서영표 동아사이언스 기자 sypyo@donga.com

[백투더 1969①]21일 2시 56분 20초 “人間 달에 섰다” 과학

[백투더 1969①]21일 2시 56분 20초 “人間 달에 섰다”

신문으로 바라본 1969년의 여름

2009년 08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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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7월 아폴로 11호의 달 정복은 지역과 인종, 이념을 떠나 전 세계를 감격과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대사건이었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었다.

인류 최초로 달에 상륙한지 40년이 지난 지금 본지는 그 때의 감동을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해 그 시기에 나온 신문(新聞)을 살펴봤다. 당시 일반 대중들이 달 탐사에 보였던 관심과 환호는 언론이 얼마나 이를 비중 있게 다뤘는지를 통해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에 1969년 6월 18일부터 8월 18일까지 동아일보에 보도된 아폴로 11호 관련 기사를 근거로 ‘백투더(Back to the) 1969’ 시리즈를 마련했다.

제1편 21일 2시 56분 20초 “인간 달에 섰다”
제2편 아폴로 11호가 남긴 잊혀진 이야기들
제3편 그해 여름 당신은 어디서 무엇을 했나



그 색시의/ 한 발톱에 턱도 대 보고/ 입술 부르르 떨고 내려오는/ 미스터 ‘앨드린’ 부러웁군
달아/ 너는/ 그저/ 그 색시의 한 개 발톱이었던 것을/ 이쁜 때도 삼삼히 끼인/ 그 색시의 한 개 발톱이었던 것을…(하략)

당대 최고의 시인 중 한 명이었던 서정주가 지은 ‘대우주의 님에게-미스터 앨드린 택(宅) 잔디밭 옆에서’. 최초로 달을 밟았던 닐 암스트롱이 아니라, 두 번째로 발을 디딘 우주비행사 에드윈 앨드린이 주인공인 게 흥미롭다. 이 시(詩)가 동아일보 1면에 소개된 날은 1969년 7월 25일, 아폴로 11호가 전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지구 귀환에 성공한 날이다. 세월이 지난 지금은 닐 암스트롱만을 기억하지만, 당시 언론은 아폴로 11호의 세 우주비행사 모두를 대체로 동등한 비중으로 다뤘다.

카운트다운 시작…태극기도 달에 가다



아폴로 11호가 발사되던 1969년 7월 16일의 동아일보 1면 ‘아폴로 11 발사, 역사적 달 여정에‘라는 제목의 기사.
출처 동아일보 1969년 7월 16일 1면

아폴로 11호에 대한 국내 일반인들의 관심은 16일 발사 일주일 전부터 서서히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동아일보도 이에 맞춰 11일부터 본격적으로 지면 곳곳을 달 탐사 보도로 채우면서 분위기를 띄워 나갔다.

당시 신문은 총 4면을 발행했는데, 발사 하루 전인 15일부터 아폴로 11호가 귀환한 25일까지는 거의 대부분 지면을 달 탐사 뉴스로 채웠다. 이는 국내의 평범한 독자에게도 아폴로 11호 뉴스는 먼 이국에서 벌어지는 막연한 이야기가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야말로 매일매일 신문으로 접하는 초미의 관심사였다.

7월 11일자 1면 ‘카운트다운 시작’이라는 제목의 기사는 보름간에 걸쳐 펼쳐졌던 한여름밤의 꿈, 아폴로 11호의 이야기를 알리는 서막과 같았다. 이 기사에서 닐 암스트롱이 ‘달 착륙선이 달을 떠날 수 없게 된다면 당신들은 며칠동안 생존할 수 있냐’는 질문에 “이틀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대답한 내용이 눈길을 끈다.

3면에는 국내 독자들이 아주 반가워 할만한 기사가 실렸다. ‘한국도 달 정복 TV 방영’이라는 제목으로 “우리나라에서도 텔레비전을 통해 아폴로 11호의 역사적인 달 착륙 실황을 볼 수 있게 된다”는 소식이었다. 방송환경이 지금보다 훨씬 열악했을 것 같은 당시에 과연 어떻게 위성 생중계가 가능했을까. 기사는 이에 대해 “일본의 NHK가 인공위성을 통해 영상을 받아 우리나라 부산시외전화국으로 보내면, 서울중앙방송국 KBS가 이를 받아 방영하게 된다”면서 “음향은 미국 우주개발기지인 ‘케이프케네디’에 주재하고 있는 KBS 특파원이 ‘미국의 소리’ 방송과 국제전신전화국을 거쳐 방송한다”고 설명했다.



우주비행사 에드윈 앨드린이 달 표면을 걷는 연습을 하고 있다.
출처 동아일보 1969년 7월 12일 1면
12일자 1면에는 에드윈 앨드린이 달 위를 걷는 연습을 하는 사진과 함께 ‘세 우주인 신검 OK’라는 기사가 실렸다. 이 기사는 “우주비행사들은 성조기와 달 착륙 기념패, 그리고 외국 원수들의 메시지가 든 마이크로필름을 달에 놓고 돌아온다”며 “유엔 및 유엔산하기관 가입국들의 국기를 달에 가지고 갈 예정”이라고 말했다. 달에 들고 갈 국기 중에는 우리나라의 태극기도 포함됐다.

2면 ‘칠면조 등 진수성찬, 달나라에서의 식사’라는 기사는 “그들은 식사를 할 때면 먹고싶은 음식에 물을 넣어 연하게 만든 뒤 마치 치약처럼 만들어진 튜브를 통해 입안에 짜 넣게 된다”고 설명해 흥미를 자아냈다.

또 ‘90년대엔 달 관광, 왕복여비 1만 달러’라는 기사도 독자의 호기심을 끌었다. 기사에 따르면 당시 미 항공우주국(NASA) 토마스 패인 국장은 “1990년 중반에는 달로 가는 관광여행이 1인당 왕복 1만 달러, 지구궤도에 설치된 우주비행장까지의 여행비는 2000달러면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달에 발을 디딜 때 첫 소감은?”…“아직 모르겠다”



미국 휴스턴 유인우주선센터. 이곳에 몰려든 전세계 취재기자는 모두 3000여 명. 당시 한국은 텔레비전과 라디오 취재진까지 포함해 모두 10명 안팎의 언론인을 파견했다.
출처 동아일보 1969년 7월 12일 4면
이 시기 미국 휴스턴 유인우주선센터로 몰려든 전세계의 취재기자는 모두 3000여 명으로 117명을 파견한 일본 기자단의 규모가 가장 컸다. 한국은 텔레비전과 라디오 취재진까지 포함해 모두 10명 안팎이었다. 당시 이곳에서 취재하던 진철주 동아일보 특파원은 ‘고조된 분위기, 거리낌없이 공개’라는 기사를 통해 기자회견장의 풍경을 아래와 같이 자세히 묘사하기도 했다.

“작전명령과도 같은 브리핑이 진행되는 우주선센터 제1호관의 분위기는 좀 어수선했다. 사람이 드나들 때마다 쾅쾅 문 닫히는 소리가 요란했고, 우주비행사나 NASA 직원의 가족인지 10살 전후의 어린이들도 기자들 틈에 끼어있는 모습은 신기하기만 했다. 계획 단계에서 실제 비행까지 모든 것을 전세계에 털어놓고 있는 미국우주계획의 철저한 공개주의의 소산일까. (중략)

기자석과 격리된 하얀 플라스틱 천막 안에 암스트롱, 앨드린, 콜린즈가 나란히 자리잡았다. 연단 아래 기자석까지의 거리는 15m. 비행사들 등 뒤에서 바람이 계속 앞으로 나오도록 돼 있었다. 혹시 감기라도 옮을까해서 취하는 당연한 예방조치였으나 기이한 기자회견임에는 틀림없었다.”

이어 훗날 역사적인 명언이 된 암스트롱의 달 착륙 소감을 예고하는 듯한 내용도 나온다. 진 특파원은 “달 표면에 첫 발을 내디딜 것을 상상만해도 어마어마한 그 순간, 월인(月人) 암스트롱은 무엇을 생각하고 지상의 우리들은 무엇을 느낄 것인가”라고 운을 떼며 “기자회견에서 암스트롱은 ‘달 표면에 내려선 첫 순간 무어라고 말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아직 생각해보지 않았다’고 대답하면서 굳은 표정이었다”고 보도했다.

아폴로 11호 보려 관람객 100만명 몰려…박정희 대통령도 달에 메시지 남겨

이틀 뒤 월요일 14일자 1면 ‘발사 앞으로 이틀’이란 기사는 세 우주인이 최종 훈련을 마쳤다는 소식과 함께 100만 명의 관람 인파가 발사대 주변에 몰려들고 있다고 보도하며 절정의 분위기를 전했다. 이 기사는 “기지 근처 코코아비치 시와 주변 촌락에는 그날의 장관을 보기위한 관광객들의 자동차 35만대가 밀어닥쳐 호텔들이 초만원을 이루고 있다”며 “미 항공우주국 당국은 국회의원 300여 명과 외교사절단 등 정부의 초청을 받은 5000명, 기자단 5000명이 기지로 몰려들 것이라고 말했는데 직접 관람객은 무려 100만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고 보도했다.



(좌)아폴로 11호 달 착륙시 달에 두고 올 기념 현판
(우)달에 남겨질 마이크로필름. 여기에는 교황 바오로 6세,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 닉슨 대통령, 대만의 장개석 총통, 우리나라의 박정희 대통령 등 73개국 정상의 메시지를 담았다.
출처 동아일보

발사 하루를 남긴 15일자 1면에는 ‘아폴로 11, 내일밤 장도(長途)에-오늘 새벽 최종 카운트다운’이란 기사가 1면 톱이었다. 같은 면 ‘떠날 차비 다 됐다’라는 기사는 전날 있은 마지막 기자회견 내용을 실었다. 회견은 기자들과 60km나 떨어진 곳에서 텔레비전을 통해 원격으로 이뤄졌다. 세 우주인은 이날 대통령과의 만찬도 취소할 만큼 출발 직전의 세균 오염을 염려했다는 내용이 흥미롭다.

이 기사는 “우주비행사들은 이날 노타이 여름차림으로 나타나 흥분이나 긴장을 모르는 듯 태연하고 담담한 표정이었다”며 “비행사들은 아폴로 11호가 사명을 완수할 확률이 80%라는 예측에 동의한다면서도 ‘무사히 돌아오리라는 확률은 더 높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이 때 기자들은 또 한 번 암스트롱에게 “달을 밟은 순간 무엇이라고 감격을 토로할 것인지 첫 마디를 준비했는가”라고 질문했다. 이에 암스트롱은 “아무 준비도 없다”며 “사실 달 탐사 준비에 너무 정신이 팔려 왔다”고 대답해 또 한번 기자들의 김을 뺐다.

15일자 2면 ‘달에 남길 승리의 어록’이란 기사는 달에 두고 올 마이크로필름에 담긴 73개국 정상의 메시지를 소개했다. 교황 바오로 6세,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 닉슨 대통령, 대만의 장개석 총통은 물론 우리나라의 박정희 대통령도 메시지를 남겼다. 특히 그리스의 파파로폴로스 군정 지도자(1967년 쿠테타로 집권)는 “우주선 이름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아폴로라는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며 “아폴로 신은 평화와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의 노력이 결코 중단되지 않을 것임을 뜻한다”고 말했다.

발사 직전 흥분의 도가니…남산 야외음악당에 대형 스크린 설치

발사 당일인 16일자 동아일보는 전날까지의 최종 상황을 담았다. 이날 1면 톱은 ‘아폴로 11 발사…역사적 달 여정에’를 헤드라인으로 ‘밤 10시 32분, 케네디 기지서’ ‘일기 괘청, 교통 지옥’ ‘상가 호텔 초만원’ ‘백만 인파…흥분의 도가니’ 등의 부제를 달았다.



달 탐사 방영을 위해 서울 남산 야외음악당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
출처 동아일보
이 기사는 “아폴로 11호를 쏘아 올릴 39A 발사대에서는 기사(엔지니어)들이 로케트에 바테리를 장진함으로써 총점검을 끝냈다”면서 “아폴로계획 책임자인 조지 헤이지는 ‘발사를 목표로 준비가 착착 완료돼 간다’고 말했으며, 발사 책임자인 로코 피트론도 ‘카운트다운이 아주 순조로운데다가 일기도 쾌청으로 예상돼 거리낄 것이 조금도 없다’고 밝혔다”고 보도했다.

같은 면에는 ‘온 세계가 장도 축원-닉슨, 세 우주인에 격려 전화’ ‘세 우주인 부인 동정’ 등의 기사도 실렸다. 세 우주비행사 중 한 명인 마이클 콜린즈의 부인은 마당에 물을 뿌리면서 “너무 덥군요. 지독히 정말 너무너무 더워요”라고 운을 떼며 “(별로 들뜨지 않은 것 같다는 기자의 질문에) 곧 마음이 울렁거리겠죠”라고 애써 미소를 띄웠다고.

3면에서는 ‘달 정복 한국 방영도 카운트다운’이라는 제목으로 국내 소식을 흥미롭게 알렸다.

“비록 나라마다 시계가 가르키는 시각은 다르지만 세계의 이목은 똑같은 시간의 ‘케이프 케네디’로 쏠려있다. 텔레비존이 놓인 안방에서 달까지는 머나먼 38만km. 이 역사적인 순간을 지켜보기 위해 한국의 집집에선 다시 한번 텔레비존 손질이 한창이며, 서울 남산 야외음악당엔 주한미군 공보원이 마련한 36평방미터의 대형 스크린이 가설되어 달 정복의 장관을 그대로 비쳐줄 채비를 마쳤다. (중략)

장마철인데다 초승께가 돼서 하늘의 달 구경을 할 수 없는 이 여름에 텔레비존 화면을 통해 둥근 달의 모습을, 그것도 사람의 발이 닿는 달의 모습을 지켜볼 수 있다는 기대에 사람들의 가슴은 부풀대로 부풀었다.”

16일 밤 10시 32분 드디어 발사!…달에서 세균 옮을 가능성 우려도



1969년 7월 16일 오후 10시 32분(한국시간) 케이프케네디 기지를 떠나는 아폴로 11호.
출처 동아일보 1969년 7월 17일 1면

5,4,3,2,1…발사.

드디어 아폴로 11호는 예정된 시각인 1969년 7월 16일 밤 10시 32분(한국시간)에 케이프케네디 기지를 떠났다. 17일자 1면 톱 ‘달 항로 쾌주’라는 제목의 기사는 “우주개척의 신기원을 이룰 아폴로 11호 우주비행사들은 대지를 박차고 대망의 달 여행을 시작했다”며 “하늘로 치솟아 11분 30초 만에 190km 상공의 지구 궤도에 진입했으며, 2시간 15분이 지나자 지구 궤도를 이탈, 시속 2만 4200 마일로 달 세계로 향했다”고 전했다.

세 우주인이 발사 뒤 휴스턴 우주본부와 나눴던 첫 마디는 “마치 안방에 앉아있는 것처럼 편안하다”였다. 또 이들이 찍은 지구의 모습은 전 세계 컬러 TV로 생중계됐다. 이 내용을 담은 기사는 “발사 20시간 후 지구에서 6만 마일 떨어진 달 항로상에서 15분 동안 첫 칼라 텔레비존 방송을 실시해 태평양 및 북미 대륙, 남미 대륙 북부, 태평안 연안을 천연색으로 보여주었다”고 보도했다.



1969년 당시 동아일보 만평을 담당한 김성환 화백의 삽화. 아폴로 11호 발사부터 지구로 돌아올 때까지의 과정을 재미있는 그림으로 표현했다.
출처 동아일보 1969년 7월 15일 4면

이날 4면에는 우주인들이 달에서 귀환한 이후의 상황을 미리 짚어보는 ‘달 검역작전 이상없다’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당시 일부 과학자들은 달에서 번식하는 세균이 세 우주비행사를 매개로 지구에 도달해 전염병이 창궐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 기사는 “우주비행사가 달 표면에서 활동하는 사이 낯선 세균을 묻혀 오고, 인류는 이들 세균에 저항력이 없어 콜레라 등과는 비교가 안될 유행병에 멸종할 수 있다”는 일부 시각을 전했다.

언뜻 황당하게 들리는 기우일 수 있으나, 당시 미국 정부는 과학자들의 이같은 우려를 받아들였다. 미국 공중위생국과 NASA 등 관련 전문기관들은 800만 달러를 들여 세 우주비행사와 우주선, 달에서 가져온 암석, 흙 등을 철저히 조사하는 연구소를 세웠다. 실제 25일 세 우주비행사가 지구로 귀환했을 때 악수나 포옹은 물론 열광적인 환영 행사는 없었다. 태평양 바다에 착수(着水)하자마자 이들은 곧바로 특수제작된 검역실로 옮겨져 8월 11일까지 각종 검사를 받으며 감금 생활을 했었다.

한국서도 TV 보며 환호성…암스트롱 “무중력상태가 참 편하다”



아폴로 11호가 16일 지구로 TV 생중계한 지구의 모습.
출처 동아일보
18일자 1면 톱은 ‘달 첫발 21일 정오에-완벽한 항진 계속’으로 아폴로 11호에 쏠린 흥분된 분위기를 이어나갔다. 3면에는 텔레비전 생방송에 관한 국내 소식을 실었다. ‘TV 생방에 모두 환호’라는 제목의 이 기사는 “한국에선 비록 천연색이 아닌 흑백으로 비쳐지는 영상이지만 우주의 경이를 눈으로 지켜본 사람들은 다시 한번 발사 때의 흥분을 되새기며 긴장 속에 환호성을 질렀다”고 보도했다.

19일자 1면 톱은 ‘내일 달 궤도 진입’으로 “아폴로 11호는 비행 55시간만인 19일 오전 5시 15분(한국시간) 달 여행거리의 80%인 32만 1868km를 돌파, 시속 3218km로 달과의 운명적 랑데부를 위해 돌진중”이라고 진행 상황을 설명했다.

같은 면 ‘세 우주인과 지상대화’라는 기사에서 에드윈 앨드린은 “아프카니스탄과 파키스탄 일대에 구름이 비교적 선명하게 드리워져 있고 그 위로는 길게 그늘이 져 있다”며 우주선에서 바라본 지구의 모습을 자세히 묘사했다.

닐 암스트롱은 “당신들은 무중력상태가 얼마나 편한지 모를거요. 나는 우주선 한가운데에 떠 있어 우주선의 모든 창문을 손으로 만질 수 있소”라며 우주선 속에서의 상황을 실감나게 전했다.

이처럼 아폴로 11호가 달에 도착하기까지의 다양한 소식들이 19일자(토요일) 신문 곳곳을 메우면서 7월 셋째 주가 마무리됐다. 그리고 그 다음주 월요일인 21일. 신문을 받아든 독자들의 손에 잔뜩 힘이 들어갈 흥분된 소식이 전해진다.

인간 달에 서다…“인류를 위한 거대한 도약의 한 걸음”



“人間 달에 섰다”. 인류 최초로 달 위에 선 1969년 7월 21일 동아일보 1면. 사진은 착륙선 안에 있던 에드윈 앨드린이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는 닐 암스트롱을 촬영한 장면.
출처 동아일보 1969년 7월 21일 1면

“人間 달에 섰다”
“암스트롱 1969년 7월 21일 11시 56분 20초”
“제1성(聲), 인류 위한 도약의 첫 발”

인류 최초로 달 위에 선 역사적인 날은 이렇게 다가왔다. 21일자 1면은 큰 사진 한 장이 지면 대부분을 차지하는 파격적인 편집이었다. 이 사진은 닐 암스트롱이 달 착륙선의 해치를 연 뒤 사다리를 타고 내려와 달 표면에 첫 발을 딛는 장면. 8줄짜리의 간략한 기사는 아래와 같이 전했다.

“미국의 우주비행사 닐 암스트롱은 21일 오전 11시 56분 20초(한국시간) 달을 디딘 첫 인간이 됐다. 암스트롱은 ‘인간을 위한 하나의 작은 발걸음이지만 인류를 위해선 거대한 도약의 한 걸음’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발밑에 깔린 달의 작은 모래알들 속에 박힌 자기의 발자국을 묘사하기 시작했다. 곧이어 에드윈 앨드린 역시 낮 12시 16분 달 표면을 밟았다. 암스트롱은 달 표면의 흙을 파서 그의 우주복 주머니에 넣었다. 이로써 드디어 억겁의 신비와 베일 속에 감추어졌던 달은 인류에 의해 정복되는 역사의 신기원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지구에서 달까지 전화 통화…“미국의 서부 사막지대 같아”



21일 낮 12시 16분(한국시간) 닐 암스트롱에 이어 두번째로 달을 밟은 에드윈 앨드린.
출처 동아일보

당시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자신의 집무실에서 달에 도착한 우주인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다. 이날 2면에는 닉슨 대통령이 “이 전화는 가장 역사적인 전화입니다. (중략) 그대들이 이룩한 일로 하늘은 인간 세계의 일부가 됐소. (중략) 인류의 역사에 있어 이 위대한 순간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은 한 덩어리가 됐소”라며 축하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닐 암스트롱은 “고맙습니다. 우리가 미국뿐만 아니라 평화를 사랑하는 전 인류를 대표해서 이 자리에 서게 된 것을 커다란 명예요 특전으로 생각합니다”라고 화답했다.

이날 3면은 ‘달 표면은 잔모래알 걷기 쉽다’ ‘암석 28kg 채취’ ‘모든 것은 선명하고 장관’ ‘허리굽히기 힘들다’ ‘발은 8분의 1인치 밖에 안 빠져’ ‘도착시 맥박수 평시의 2배’ ‘착륙선 고요의 바다에 안착’ ‘산과 분화구 투성이 바위도 가지각색’ 등의 제목으로 관련 소식들이 채워졌다. 이 기사들이 전하는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다.

“닐 암스트롱과 에드윈 앨드린은 오전 11시 40분(한국시간) 달 착륙선의 문을 열고 달 표면에 첫 발을 내딛기 위한 마지막 작업에 돌입했다. 이들 두 우주인은 착륙선 안의 기압이 문을 열 수 있도록 떨어지는 것을 10분 이상 기다린 후 지상관제소에 ‘이제 해치가 열리고 있다’고 보고했다. 착륙선 문이 열린 뒤 암스트롱은 달 표면 산책을 위한 모든 기기를 갖춘 채 착륙선에서 달 표면에 내려져있는 사다리를 뒷걸음질로 서서히 밟으며 달 표면에 근접해갔다. (중략) 암스트롱은 달 표면 산책 첫 대목에서 ‘움직이는데 곤란이 없는 것 같다. 걸어다는데도 지장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우리는 대체로 대단히 평탄한 장소에 서 있다’고 말했다.



동아일보 1969년 7월 19일자에 소개된 달 착륙선 모형도
출처 동아일보
이 착륙 광경을 담은 텔레비존 영상은 휴스턴 우주센터로 보내져 다시 세계의 청취자들에게 중계됐다. 암스트롱이 내려설 때 지구는 바로 그의 머리 위에 보였다. 그는 ‘사물을 똑똑하게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또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달의 표면을 잔모래알이라고 표현했다. (중략) 한편 모선에 남아있는 마이클 콜린즈는 달로부터 69마일 떨어진 궤도를 계속 돌고 있다.”

“암스트롱은 달 착륙선의 발 받침대가 달 표면의 먼지 낀 흙 속으로 한두 인치 밖에 들어가지 않았다고 말했다. 또 그의 발은 8분의 1인치 밖에 빠지지 않았다고 보고했다. (중략) 암스트롱은 ‘마치 미국의 서부 사막지대 같다’고 말했다. (중략) 암스트롱은 달 표면의 흙을 파면서 ‘재미있다. 아주 부드러운 표면이다. 그러나 표면의 흙을 팔 때 대단히 끈적끈적한 물건 같았다’고 말했다. 그는 또 ‘미세한 입자 위에 내 구두의 발자국을 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4면에는 달 착륙을 지켜본 영국 런던, 구 소련 모스크바, 일본 도쿄, 프랑스 파리 등 세계 곳곳의 반응을 소개했다. 또 세 우주인의 가족들이 환호하는 사진과 함께 간략한 소감들도 실었다.

‘지구를 흔든 환호 흥분의 절정’이란 기사는 “아폴로 11호가 드디어 달에 착륙한 역사적인 21일 밤 세계 방방곡곡에서는 5억의 인구가 환호와 감격에 사로잡혀 온통 흥분의 도가니를 이루었다”며 “2억의 미국 전 국민은 가정에서 바에서 나이트클럽에서 감옥에서 또는 공원 광장 공항 등에 설치된 특설 TV 스크린을 통해 감격과 흥분 속에 달 착륙선의 착륙광경을 구경했으며, 뉴욕 시에서는 특히 수천 명의 시민들이 달을 기념하기 위해 모두 하얀 옷을 입고 센트럴파크에 모여 달 착륙 광경을 구경해 이채를 띠었다”고 보도했다.

달 인력권 벗어나 지구로…우주선 기상 악화로 도착지점 변경



(좌) 달 표면에 선 착륙선과 우주인 (우) 달 표면의 ‘고요의 바다‘에 찍힌 닐 암스트롱과 에드윈 앨드린의 발자국
출처 동아일보

다음날인 22일부터 24일까지는 아폴로 11호가 지구로 돌아오기까지의 과정을 중심으로 소식이 전해졌다. 22일자 1면에는 ‘달 착륙선 지구 귀환길에’, 3면에는 ‘신비 풀 자주색 돌 발견’ ‘코코아 빛 먼지 덮혀…미 서부처럼 아름다워’ 등의 기사가 실렸다.

23일자 1면에는 ‘달 인력권 벗어나’라는 제목으로 “23일 오전 2시 39분(한국시간) 달의 중력권을 탈출, 오전 4시 57분에 예정대로 중간 진로 수정과 15분간의 TV 생방송을 거쳐 시속 9100km로 지구의 품으로 달려오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24일자 1면에는 ‘아폴로 11 내일 새벽 착수(着水)’라는 기사가 지구 귀환 전 막바지 소식을 알렸다. 이 기사는 대기권 돌입 단계가 최종 고비가 될 것이라고 전했다. 또 착수지 변경을 알리는 내용도 있다. 기사는 “태평양 상의 아폴로 11호 착수 예정지의 기상조건이 악화되어 착수 목표지점이 바뀌었다”며 “착수 예정지에서 북쪽으로 398km 떨어진 곳에 착수하게 된다”고 보도했다.

지구 품으로 돌아오다…검역실로 곧장 이동, 18일간 격리



아폴로 11호의 세 우주인은 총 153만 3215km에 달하는 긴 우주여행을 마치고 25일 새벽 1시 50분(한국시간) 동트는 태평양 상에 착수, 무사히 지구의 품으로 돌아왔다.
좌측 상단에 있는 사진은 닐 암스트롱이 헬리콥터에 의해 인양되는 장면이다.
출처 동아일보 1969년 7월 25일 4면

25일 마침내 세 우주인이 지구로 귀환했다.
“인류 사상 최초로 달을 밟은 아폴로 11호의 미국 우주인들은 24일 총 153만 3215km에 달하는 긴 우주여행을 마치고 25일 새벽 1시 50분 동트는 태평양 상에 착수, 무사히 지구의 품으로 돌아왔다. 악천후를 피하여 착수 지점이 변경되고 우주선의 착수 자세가 상하로 뒤집혀 끝까지 긴장이 계속됐으나 우주인을 실은 헬리콥터가 항공모함 ‘호네트’ 호에 내리자 초조하게 기다리던 닉슨 대통령은 박수로 그들을 환영했고 육상은 환성으로 회오리쳤다.”

이 내용을 실은 25일 1면 ‘아폴로 11 달에서 돌아왔다’는 기사는 “우주인들은 달에서 어떤 세균에 감염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가정 하에 종래처럼 동료들과 곧 어울리지 못하고 함상에 대기 중이던 이동 검역실로 곧장 들어갔다”며 “앞으로 이들은 18일 동안 이 검역실에서 엄격한 검사를 받게 된다”고 보도했다.



이동 검역실 창문 너머의 세 우주인. 이들은 지구에 도착하자마자 달에서 감염된 세균이 있는지 검사하기 위해 곧장 이동 검역실로 들어갔다. 그 뒤 18일 동안 이곳에 격리된 채 엄격한 검사를 받았다.
출처 동아일보 1969년 7월 26일 2면
같은 면 ‘땀 쥔 순간 거꾸로 내렸다-악수없이 안타까운 격리’라는 기사는 우주인 귀환 뒤의 장면을 스케치했다.

“꿈틀대고 이상한 몸짓으로 달 표면을 걷던 미국 우주비행사들은 항공모함 ‘호네트’ 선상에 내려섰을 때도 마스크와 방호복 차림으로 나타나 또 다시 현실세계가 아니라 과학소설 같은 장면을 연출했다. 착수 직전 닉슨 대통령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듯 벙글거리며 옆에 선 NASA의 토마스 패인 국장과 대화를 나누었으나 착수 예정시간이 지나고도 우주선 모습이 한참동안 보이지 않고 또 그 위치도 확인이 되지 않자 초조한 표정을 지었다.

(중략) 암스트롱, 앨드린, 콜린즈가 줄을 타고 헬리콥터에 오르는 모습이 텔레비존에 비칠 무렵 선상에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고, 선상에 헬리콥터가 내리자 닉슨 대통령은 박수를 치며 좋아하고 손을 흔들어 환영을 표시했다. (중략) 우주비행사들은 헬리콥터에 앉은 채 바퀴 없는 대형 버스처럼 생긴 이동 격리실 가까이 가서 불과 열 발자국 거리를 걸어 격리실 안으로 사라졌다. 세기적인 달 여행에서 돌아온 영웅들을 대접하는 절차로서는 몹시나 매정스럽고 섭섭하기 짝이 없는 장면이었다. 악수도 축사도 없었다.”

우리 국민도 밤샘 시청…우주인 가족들 무사 귀환에 환호성



아폴로 11호 귀환을 기뻐하는 세 우주인 가족들의 사진과 반응.
출처 동아일보 1969년 7월 25일 3면
이날 3면 ‘뜬 눈의 한국 시청 - 안착에 축하 환성’이라는 기사는 국내 반응을 담았다. 이 기사는 “세 우주인이 지구에 돌아오는 시간 우리나라에서도 TV와 라디오를 통해 그들의 귀환 모습을 시청하기 위해 시민들은 초저녁부터 특집 해설 프로에 귀를 기울이면서 예정된 귀환 시간인 25일 새벽 1시 50분을 눈 앞에 두고 초조한 마음으로 밤샘을 했다”며 “이윽고 ‘두 우주인 무사히 지구귀환’이라는 보도가 나오자 눈과 귀를 모으던 시민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박수 갈채, 달나라의 이야기에 꽃을 피우며 밤 가는 줄 몰랐다”는 반응을 전했다.

하지만 “이날 밤 TV가 없는 사람들은 서울 남산 야외음악당에 설치된 대형 TV를 시청하는데 큰 기대를 걸었으나 통행금지가 해제되지 않아 몹시 섭섭해하는 모습도 보였다”는 웃지 못할 소식도 전하며, 그만큼 아폴로 11호에 대한 당시 일반인들의 관심이 대단했음을 보여줬다.

또 같은 면에는 ‘기쁨에 숨가쁜 세 여인 - 외부와 접촉 끊고 긴장 순간 지켜봐’라는 제목으로 아폴로 11호 귀환을 기뻐하는 우주인 가족들의 사진과 반응들이 실렸다. 4면에는 귀환 당시의 갖가지 사진들로 지면을 채웠다.

화성 탐사로 우주 분위기 이어가…세 우주인 검역 해방, 가족 품으로

26일 이후 세 우주인에 관한 소식은 점차 줄어들었지만, 한달 여가 지난 8월 18일까지도 보도는 틈틈이 이어졌다. 달에서 찍은 자료 사진과 갖가지 뒷이야기를 담은 화보들도 하나씩 공개됐다. 아폴로 11호에 관한 보도 열기가 가라앉을 무렵인 30일부터는 미국 마리너 6호와 7호의 화성 탐사에 관한 기사를 연일 보도하면서 우주과학으로 들뜬 한여름의 분위기를 이어나갔다.



11일 검역에서 풀려난 닐 암스트롱이 휴스턴의 유인우주인센터로 출근하고 있다.
출처 동아일보
30일자 2면과 3면에는 화성으로부터 123만 3600km 떨어진 거리에서 마리너 6호가 찍은 최초의 화성 사진이 TV 방송으로 공개됐다. 8월 1일자 2면에서는 ‘화성에 구름, 운하 - 생명체는 없는 듯’이란 제목으로 마리너 2호가 지구에 두 번째로 보낸 사진을 공개했다.

2일자 2면 ‘마리너 7호 사진 촬영 개시’라는 기사는 “1973년까지 무인우주선을 화성에 착륙시키려는 ‘바이킹’ 계획의 전령사인 미국 화성탐색위성 마리너 7호는 1일 밤 마리너 6호에 뒤따라 화성 상공 160만km 지점에서 화성의 신비를 파헤치기 위한 사진 촬영을 개시했다”며 “마리너 7호의 화성 근접 사진은 화성에서의 생물체 생존여부를 판가름하는 결정적인 자료를 제공할 것”이라는 소식을 알렸다. 마리너 7호가 보낸 화성의 모습은 6일자 2면에도 이어졌다.

아폴로 11호에 관한 소식은 8월 11일 1면에 모처럼 다시 등장했다. 달 세균에 오염됐을 것을 염려한 세 우주인이 21일 간의 검역을 마치고 드디어 세상 밖으로 나왔다는 기사였다. ‘세 우주인 검역 해방’ ‘NASA 발표, 달 세균 감염 없다’라는 제목들을 단 이 기사는 아래와 같이 소식을 전했다.

“휴스턴 우주본부의 달 물질 연구소(LRL) 방역실에 갇혀 21일 동안 격리 생활을 해왔던 세 우주인이 11일 오전 11시경(한국시간) 건강한 모습으로 검역실을 나와 처음으로 신선한 대기를 들이마셨다. 세 우주인은 검역실을 나온 즉시 애타게 기다리던 가족들의 품에 안겼으며, 의사들은 세 우주인이 달 먼지에 전혀 오염되지 않았고 정상적인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고 최종진단결과를 발표했다.”

아폴로 11호와 함께 했던 1969년의 꿈같은 여름은 이렇게 서서히 저물어갔다.



아폴로 11호 우주비행사. 왼쪽부터 닐 암스트롱, 에드윈 앨드린, 마이클 콜린즈
출처 동아일보


서영표 동아사이언스 기자 sypyo@donga.com

달착륙 음모설, 그리고 달을 향한 또다른 도전 과학

달착륙 음모설, 그리고 달을 향한 또다른 도전[제 969 호/2009-08-17]
1997년作 영화 왝더독(Wag the Dog)의 이야기. 미국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대통령이 백악관에 견학 온 걸 스카우트 학생을 성추행하는 엄청난 사고가 발생한다. 그러자 백악관은 국민들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정치 전략가와 할리우드의 영화 제작자를 동원해 있지도 않은 전쟁을 기획하고 최첨단 그래픽과 세트를 활용해 긴박한 전쟁 상황을 만들어 TV로 생중계한다. 결국 현직 대통령은 가상의 전쟁 시나리오를 통해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다는 내용이다.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한 건 1969년 7월21일. 그러나 영화처럼 ‘미국이 가지도 않은 달에 다녀왔다고 조작했다’란 음모론은 달 착륙이후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식지 않고 있다. 최근에는 영국 일간지 텔레그래프가 달 착륙 음모론을 뒷받침하는 10대 쟁점을 제기했고, 다큐멘터리를 통해 구체적인 의혹을 제기한 곳도 있다.

이미 매체를 통해서 의혹이 제기됐다가 해명된 사례를 몇 가지 보자. 먼저 가장 유명한 것이 ‘공기가 없는 달에서 성조기가 휘날렸다’는 지적이다. 당시 영상에서는 분명 성조기가 반듯하게 펼쳐져 있고 또한 펄럭펄럭 휘날렸다. 진공 상태인 달에서 어떻게 깃발이 펼쳐지고 휘날리는 것이 가능하냐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의혹은 사진만 자세히 보았어도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의 사진자료를 구해 성조기 부분을 잘 살펴보면 깃발의 가로 부분에 막대기를 넣어둔 것이 분명히 보인다. 애써서 달까지 갔는데 깃발이 잘 보이지 않으면 곤란하니, 일부러 위쪽에 막대기를 넣어 펼쳐지도록 만들어 두었다는 설명이다. 또 깃발이 바람에 펄럭이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사람이 손으로 만졌던 힘이 남아서 계속 흔들렸기 때문이다. 영상을 자세히 보면 사람의 손이 닿았을 때 깃발이 흔들리는 모습도 확인할 수 있다. 달에 성조기를 세울 계획을 입안했던 유인우주센터(1973년 존슨우주센터로 이름이 바뀜)의 잭 킨즐러는 1992년 NASA공식 해명을 통해 가로 막대를 넣었고, 밑부분에는 줄을 넣어 약간 울게 함으로써 깃발이 바람에 휘날리는 효과를 연출했다’고 밝혔다.

또 일부 사람들은 ‘달에서의 사진을 보면 하늘에 별빛이 없다’며 의혹을 가지기도 한다. 지붕이 덮인 스튜디오에서 촬영한 증거가 아니냐는 주장이다. 이와 관련해 당시 미국 항공우주국(NASA)은 별이 달 표면의 밝은 배경과 지구로부터 온 빛 때문에 가려졌을 것이라는 답을 내놓은 바 있다.

사실 어느 정도 사진을 찍을 줄 아는 사람이라면 별 빛이 나오지 않은 것을 문제 삼지는 않을 것이다. 카메라의 노출시간을 조정해 눈앞의 밝은 피사체만을 촬영해야 했기 때문에 미약한 별빛이 보이지 않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의혹으로 그림자의 방향이 지적됐다. 달에는 조명이 태양 하나뿐인데 우주비행사들과 우주선의 그림자가 서로 조금씩 다른 방향으로 되어있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조명이 하나라도 울퉁불퉁한 지형에서는 그림자가 여러 방향으로 뻗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만약 조명을 2개 썼다면 그림자도 2개씩 생겼을 것이라는 설명에 이 같은 의혹은 신빙성이 떨어진다.

우주 기술이 나날이 발달하지만 미국은 왜 더 이상 우주인을 보내지 않느냐는 물음도 제기된다. 그러나 미국은 지난 1969년 아폴로 11호 이후 1972년 12월 아폴로 17호까지 10명의 우주인을 더 보낸 바 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여러 실험을 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달 표면에 레이저 반사경을 지구 방향에 맞게 설치한 것이다. 이 장치를 지금도 활용한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진 이야기다. 이 장치는 지구에서 레이저를 발사해 지구와 달의 정확한 거리를 알아보는 목적으로 쓰이고 있다.

조작설이 처음 불거진 건 달 착륙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다. 미국의 빌 케이싱이란 작가는 1974년 ‘우리는 결코 달에 가지 않았다‘란 책으로 처음 조작설을 들고 나와 반향을 일으켰다. 또 조작설로 한창 시끄러웠던 2002년, 닐 암스트롱과 함께 달에 처음 다녀왔던 버즈올드린이 달 착륙 허구를 주장하는 영상물을 만든 바트 시브렐과 논쟁을 벌인 이야기도 유명하다. 버즈올드린은 바트 시브렐이 “성경에 손을 얹고 달에 갔다 왔다고 말할 수 있느냐”고 비난하자 분에 못 이겨 그의 뺨을 때리기도 했다.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의 한 인사는 NASA의 지인에게 달 착륙의 의구심을 말하자 “달에 갔다 온 것은 분명하다. 다만 극적인 효과를 위해 일부 장면은 연출해 촬영한 것이 있다”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달에 꼽혔던 성조기. 깃발에 그림자가 보이질 않아 합성사진이란 의혹을 샀다. (왼쪽) NASA
가 공개한, 달에 설치됐던 성조기(가운데), 암스트롱과 올드린이 성조기를 꽂고 있다(오른쪽).
사진 출처 NASA)>

미국이 아폴로 17호 이후 유인 달 탐사를 중단한 이유는 비용 문제로 풀이된다. 당시 미국은 구소련과 치열한 우주경쟁 시대에 있었고 우주 선점을 위해 막대한 출혈을 감당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소련이 손을 뗀 이후는 경제 논리가 더 큰 설득력을 얻었고, 무리해서 달에 사람을 보낼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여러 나라가 협력해 만든 국제우주정거장 ISS가 그렇듯 미국은 앞으로 무리한 독자개발보다는 국제 공동 행보에 나설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그러나 미국의 향후 행보를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지난 2004년 조지 부시 대통령은 우주탐사비전을 발표하며 달을 행성탐사의 전초기지로 활용하겠다는 원대한 프로젝트를 선언한 바 있다. ‘달, 화성, 그리고 그 너머(Moon, Mars, and Beyond)’라는 이름이 말해주듯 화성 개척의 전초기지로서 달에 영구기지를 건설한다는 것이다. 이 계획은 2024년 4명의 우주인이 6개월간 체류하는 걸 목표로 하고 있다. 이는 인류가 거주 영역을 지구 밖으로 확장하는 첫 번째 시도로서 의미가 있다.

세계 각국도 달 탐사 경쟁에 뛰어들었다. 중국은 달 탐사위성 창어(嫦娥) 1호를 발사했고, 일본은 달 탐사위성 가구야, 인도도 달 탐사위성 찬드라얀을 통해 달 개척에 나선 상태이다. 러시아는 30년간 중단했던 달 탐사 프로젝트를 재개해 2012년 달 탐사 우주선을 보낼 계획이며, 우리나라도 국제적인 달 탐사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다만 우리나라가 독자적인 달 탐사를 계획하자는 의견에 대해서는 찬반이 엇갈린다. 백홍열 전 항공우주연구원장 “지금 우리가 억지로 선진국의 우주개발을 쫓아가긴 어렵다. 실용위성 개발에 주력할 때다”라고 밝힌 바 있다.

한편에서는 달 착륙의 진위를 말하고 있지만, 이 시간에도 달을 향한 또 다른 도전들이 시작되고 있다. 그것은 인간의 위대한 꿈을 실현시키는 가장 상징적인 도전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아폴로 11호의 선장으로 처음 달에 발을 내디뎠던 닐 암스트롱이 인류에게 남긴 말을 전한다.

“한 사람에게는 작은 한 걸음이지만 인류에게는 위대한 도약이다” (Thats one small step for (a) man, one giant leap for mankind)"

글 : 강진원 TJB 과학담당기자


KISTI NDSL(과학기술정보통합서비스) 지식링크


○관련 논문 정보
달 탐사위성 개발 현황 [바로가기]
국제 달탐사 네트워크(ILN; International Lunar Network)의 과학임무 [바로가기]
한국형 달탐사 임무 예비 설게 소프트웨어의 개발 [바로가기]

○관련 특허 정보
지구-달계의 두 안정 궤도 및 평형 궤도를 이용한 통신위성 시스템 및 그 통신위성 추적 방법(한국등록특허) [바로가기]
달 승강기 (한국공개특허) [바로가기]

○해외 동향분석 자료
인도, 찬드라얀이 달의 풍부한 광물질 발견 - 2009년 [바로가기]
영국, 차기 우주 사업 계획 발표 - 2009년 [바로가기]
미국, 달의 어두은 크레이터 지형 분석 - 2009년
[바로가기]




주제 우주/항공/천문/해양 ; 물리학
키워드 달 착륙; 아폴로; 나사;

화성의 ‘직사각 물체’… “외계생명체가 만든 거냐” 공방 재연 과학

화성의 ‘직사각 물체’… “외계생명체가 만든 거냐” 공방 재연

[쿠키 톡톡] 화성의 지표면에 직사각형의 ‘물체’가 찍힌 사진이 공개돼 생명체 논란을 재연시키고 있다.

영국 대중지 ‘더선’은 미국항공우주국(NASA)의 화성관측궤도선(MRO·Mars Reconnaissance Orbiter)이 촬영한 지표면 화상 사진을 고화질로 분석한 결과 이같은 조형물이 포착됐다고 전했다.

더선은 이 물체가 높이 5m에 이르며 2001년 제작된 영화 ‘스페이스오디세이’에 등장했던 검은색 비석(monolith)과 비슷하게 생겼다고 분석했다. 영화에서 조형물은 인류 진화의 열쇠를 쥔 것으로 표현된다.

역사상 2번째로 달의 지표면을 밟았던 우주인 버즈 알드린씨는 더선 인터뷰에서 “인류는 화성을 찾아가봐야 합니다. 그곳에는 감자 모양의 작고 괴상한 물체가 7시간마다 출현한다니까요”라며 “누가 그곳에 그런 물체를 가져다 놓았는지 확인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애리조나대학의 과학자들은 그러나 이 물체를 단순한 ‘암석’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고 있다. 대학의 행성연구소 관계자는 “인공적으로 보인다고 누군가 가져다 놓은 조형물이나 비석이라고 말한다면 덜떨어진 행동”이라고 말했다.

전문가의 일침에도 일부 괴생명체를 믿고 싶어하는 네티즌들은 화성에 생명체가 있다는 점이 확실해졌다며 전세계 정부가 합심해 보다 적극적인 탐사에 나서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김상기 기자 kitti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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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커버 선정, 과학의 8대 대실수 (상) 과학

디스커버 선정, 과학의 8대 대실수 (상) 자석 섬에서 자연발생설까지
2009년 08월 06일(목)

보통 우리는 상대성이론이나 만유인력의 법칙과 같은 과학의 위대한 이론에 대해서만 주로 다룬다. 이들 혁명적인 이론이 세상을 보는 우리의 눈을 확 달라지게 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그러나 과학자들이 내놓은 생각들이 모두가 성공적인 건 아니다. 과학의 역사에서는 한때 뜨거운 관심을 받았던 틀린 이론들도 많다.

최근 미국의 과학잡지 디스커버는 과학에서 흥미롭긴 하지만 틀린 것으로 판명난 과학의 대실수 8가지를 소개했다. 비록 이론은 틀리긴 했지만 이를 내놓은 과학자의 창의성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살펴볼 수 있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과연 어떤 것들인지 만나보자.

1. 자석의 섬을 조심하라

▲ 북극은 바다다. 하지만 콜럼버스 이후 항해가들은 북극에 강한 자기를 띤 가상의 섬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나침반을 이용해 대서양을 건너갔을 때 그는 자신이 얼마나 무모한 일을 벌이는지를 전혀 알지 못했을 것이다. 사실 그때까진 그 누구도 몰랐다. 당시 콜럼버스는 나침반의 원리를 이렇게 생각했다. 북극성이 지구의 북쪽으로 나침반을 끌어당긴다고 말이다.

그러나 콜럼버스 이후의 항해자들의 생각은 이와는 달랐다. 지구의 북극에 자기를 띠는 거대한 섬이 존재해서 나침반이 북극을 가리킨다고 생각한 것이다.

당시 그 섬에는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섬의 강한 자기 때문에 섬 가까이로 가면 배에 달려 있는 금속물질이 끌려나와 배가 난파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었다. 항해가들은 바다를 항해할 때 그 섬에 가까이 가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

그 섬의 이름은 ‘루페스 니그라’(Rupes Nigra) 또는 ‘블랙 락’(Black Rock)이라고 불렸는데, 콜럼버스 항해 이후 16-17세기에 제작된 지도에 나타난다. 만약 콜럼버스 시대에 이 섬에 대한 얘기가 등장했으면 어땠을까? 그는 어쩌면 대서양을 횡단하는 모험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오늘날 우리는 나침반이 거대한 자석인 지구가 만들어내는 자기장을 따라 나침반의 바늘이 가리킨다고 알고 있다. 이 사실은 『자석에 관해서』라는 책을 낸 영국의 과학자 윌리엄 길버트(1544-1603)가 처음으로 내놓았다. 

2. 신비에 빠진 연기의 이론

▲ 나무가 타면 왜 가벼운 재만 남을까? 나무 속의 뭔가가 빠져나갔기 때문이 아닐까? 17세기 화학자들은 플로지스톤이라는 신비로운 물질을 생각해냈다. 
17세기 화학자들이 나무가 타는 것을 보고 나무에서 플로지스톤(phlogiston)이라는 신비로운 물질이 빠져나온다고 생각했다. 이 물질은 공기 중에서 쉽게 타며 색도 없고, 향도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플로지스톤 설은 무거운 나무가 바람에 흩날릴 정도로 가벼운 재로 바뀌는 이유를 잘 설명했다. 공기 중으로 플로지스톤이 빠져나가서 그렇다는 것이다. 한편 화학자들은 갇힌 공간에서 나무가 완전히 타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는 이렇게 설명했다. 탄 나무만큼의 플로지스톤만 공기가 받아들일 수 있다고 말이다. 이렇게 플로지스톤 설은 당대 최고의 연소이론이었다.

그러던 플로지스톤 설이 종말을 맞은 건 근대화학의 창시자 앙투안 라부아지에(1743-1794)에 의해서다. 1777년 라부아지에는 산소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그 기체가 연소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고 발표했다.

3. 팽창하는 지구

▲ 지구가 작았다가 점점 팽창하면서 땅덩어리가 여러 개로 나뉘어 떨어져나갔다는 과거의 주장은 베게너의 대륙이동설이 등장하기 전까지 꽤 그럴듯해 보였다. 
유럽인들이 신세계라는 대륙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알아가면서 의구심을 갖기 시작했다. 남아메리카와 아프리카를 붙여 보았을 때 너무나도 잘 들어맞자 한때 지구의 땅들이 서로 달라붙어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그런데 어떻게 거대한 땅덩어리가 이렇게 멀리 떨어지게 된 걸까? 20세기로 들어서면서 이탈리아의 지질학자 로베르토 만토바니(1854-1933)는 이에 대한 하나의 가설을 발표했다. 지구가 팽창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한때 하나의 땅 덩어리가 지금보다 작은 지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열적 팽창으로 지구의 표면이 점점 늘어났다.

그리고 화산이 거대한 땅덩어리를 좀더 작은 조각으로 나누어놓았다. 지구는 점점 팽창해나갔고 그 결과 조각난 땅덩어리들은 서로 점점 멀어졌다. 그리고 그 사이 공간을 바다가 채웠다.

한동안 만토바니의 주장은 꽤 그럴 듯한 것으로 받아지기도 했다. 알프레드 베게너(1880-1930)가 대륙이동설을 들고 나오기 전까지 말이다.

4. 無에서 생명 탄생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발생 이론을 최초로 제시했다. 무생물적인 물질로부터 살아있는 생물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개구리는 봄에 강의 진흙 속에서, 생쥐는 곰팡이가 핀 곡식에서, 구더기는 썩은 고기에서 자연적으로 생겨난다는 것이다. 오늘날 얼토당토않게 보이는 이 이론은 무려 2천년 동안이나 사람들에게 과학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 쌀독에 쥐가 들어있는 걸 보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쌀독에서 자연적으로 쥐가 생겨난다는 자연발생설을 내놓았다. 놀랍게도 이 주장은 2,000년 동안 사실처럼 받아들여졌다. 
그러던 게 17세기 이탈리아 의사, 프란체스코 레디(1626-1697)가 처음으로 자연발생설을 부인하고 나섰다. 레디는 당시 통제된 과학적 실험을 한 최초의 과학자 중 한 명이다.
 
그는 소고기 덩어리는 하나는 뚜껑이 없는 유리 속에, 다른 하나는 파리가 접근할 수 없는 닫힌 유리 속에 넣었는데, 뚜껑이 열려 있는 유리 속에서만 구더기가 생기는 것을 보았다.

2세기가 지나서 루이 파스퇴르(1822-1895)는 자연발생설이 세균 증식을 설명하지 못한다고 증명했다.

박미용 기자 | pmiyong@gmail.com

저작권자 2009.08.06 ⓒ ScienceTimes

화성의 '사각 돌기둥', 정체는 뭘까 과학

화성의 '사각 돌기둥', 정체는 뭘까 hotiss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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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05 14:20 노컷뉴스 김효희 기자

 

지난달 말 화성 정찰위성이 찍은 5m 크기의 대형 돌기둥 사진이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5일 호주 매체 데일리텔레그래프 등 외신들은 지난달 말 화성 정찰위성이 165마일(약 265km) 상공에서 고해상도 카메라로 포착한 돌기둥에 대해 인공적인 건축물인지, 자연적으로 생성된 암석인지 의견이 분분하다고 보도했다.

또한 외신들은 새로 발견된 화성의 돌기둥이 지난 2001년 만들어진 영화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한 장면에 등장하는 원시적인 대형 돌비석의 모양과 흡사하다고 보도했다.

최근 화성의 생명체 존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이 돌기둥이 인공적인 건축물이라면 화성의 원시 문명이 존재한다는 것이기 때문에 각계의 관심이 쏠린 것.

하지만, 애리조나 대학의 과학자들은 이 돌기둥은 단순히 부서진 암석이라고 보고 있다.

이 대학측은 "이 돌에 대해 인공적인 의미를 암시하는 구조물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고 본다"면서 "사실 암석이 사각형 모양으로 부서진 것에 가깝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특히 과학자 알프레드 맥켄은 "지구나 화성, 다른 행성에도 사각형 암석은 많다"고 분명한 선을 긋기도했다.

하지만 해외 누리꾼들은 '우리가 직접 화성에 가서 이것이 무엇인지 확인하기 전까지 확실히 알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외신들은 최근 화성에서 찍힌 사진들 중 사람의 얼굴을 닮은 부분이나 독특한 모양의 이미지들을 포착해 보도하는 등 화성의 생명 존재의 가능성에 대해 높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3억 년 전 고생대 거미, 3D로 재탄생 과학

3억 년 전 고생대 거미, 3D로 재탄생
3억 년 전에 살았던 생물이 3D 컴퓨터 그래픽으로 되살아났다.

영국 임페리얼단과대학 연구팀은 현대의 게거미(Crab Spider)와 유사한 ‘C. 힌디’(Crytomartus Hindi)와 ‘E. 프레스티비시’(Eophrynus prestivicii) 화석 두 종을 3D로 재현했다.

이 생물들은 고생대에 속하는 석탄기(3억 4500만~2억 8000만 년 전)에 살았으며, 공룡시대 이전의 것으로 알려져있다.

연구팀은 CT를 이용해 여러 각도에서 3000여 장의 사진을 찍은 뒤, 이를 한데 모아 임페리얼대학에서 자체 개발한 프로그램으로 3D화 하는데 성공했다.

연구팀은 이 3D 이미지가 이전 동물화석 연구에서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사실들을 말해준다고 밝혔다.

‘C. 힌디’의 앞다리 2개는 이 동물이 거미처럼 먹이를 움켜쥘 줄 알았다는 것을 말해주며, ‘E. 프레스티비시’는 등에 난 단단한 돌기들을 방어수단으로 삼아 양서류에게 쉽게 잡아먹히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또 이 생물들은 현대의 거미처럼 잠복해 있다가 공격하는 습성을 가졌으며, 꽃잎의 깊숙한 곳이나 풀잎 등에 가만히 누워 먹이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가, 가까이 왔을 때 포식하는 방식을 쓴 것으로 추측된다.

연구를 이끈 러셀 가우드 박사는 “이 3D 이미지들은 과거 생물을 예전 모습으로 되돌려 놓을 뿐 아니라 조금 더 자세히 관찰할 수 있게 도와준다.”며 “우리의 연구는 지구의 역사가 시작됐을 때 어떤 일이 있었고, 지구의 생물들이 어떻게 살아남고 멸종했는지를 알 수 있게 도와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한편 이 연구결과는 영국 학술원 생물학 저널(Royal Society journal Biology Letters)에 실렸다.

사진=PA

서울신문 나우뉴스 송혜민 기자 huimin0217@seoul.co.kr

기사일자 : 2009-08-05  


일본 놀이용 레이저 포인터 주의 요망 레이저포인터

일본 놀이용 레이저 포인터 주의 요망


일본 놀이용 레이저 포인터-시력 저하, 망막 손상 등 사고 우려 있어 주의 촉구

레이저 포인터는 강연회 등에서 레이저 광선을 쏘아 지시봉 대신 사용하는 문구용품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키홀더와 펜형의 놀이 도구로 판매돼 어린이들이나 청소년들이 많이 사용하고 있다.

일본 국민생활센터에는 지난 1997년에 처음 `레이저 포인터를 가지고 놀다가 레이저 광선이 눈에 닿아 상해를 입었다'는 사고가 보고된 이후 올 2월까지 31건의 위해정보가 접수됐다. 주요 사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레이저 포인터 광선이 12살 된 초등학생의 눈에 닿아 망막에 화상을 입었는데 사고 뒤 1년이 지났는데도 후유증이 남아 있다. 전철 안에서 초등학생이 휘두른 레이저 포인터 광선이 2살과 6살 아이의 눈에 닿아 망막에 약간 손상을 입었으며, 의사의 진단 결과 후유증 여부는 2~3년이 지나봐야 안다고 한다. 중학교 교실에서 몇몇 학생이 레이저 광선이 나오는 장난감을 휘두르다가 광선이 다른 학생의 눈에 닿아 시력이 저하됐다.

레이저 포인터의 레이저 광선은 몇 백m까지 이르기 때문에 무심코 가지고 놀다가 다른 사람의 눈에 광선이 닿을 수 있어 위험성이 높다. 그런데도 일본에서는 올해 초까지 레이저 포인트에 대한 판매 규제가 없었다.

그러나 위해정보가 많이 접수되자 국민생활센터는 정부와 관련 업계에 경고성 표시 부착을 권고했고, 그뒤 레이저 포인터는 소비생활용제품안전법의 규제 대상이 되어 지난 1월31일부터 안전 기준에 적합하지 않은 것은 제조·수입이 금지됐다. 또 문구 전용과 완구 등으로 구분해 등급별로 검사를 받은 뒤 특정 마크를 부착하도록 의무화시켰다.

국내에도 레이저 포인트가 장난감으로 판매되고 있는데, 부모들은 될 수 있으면 어린이가 가지고 놀지 않도록 주의시키고, 특히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는 사용하지 않도록 주의를 주어야 할 것이다. 또 레이저 광선을 절대 직시하지 않도록 하고, 만약 레이저 광선이 눈에 닿았다면 즉시 안과에서 치료를 받도록 해야 한다.

이진숙 한국소비자보호원 홍보실


레이저 장난감`실명 위험 레이저포인터

레이저 장난감`실명 위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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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증안된 중국산...초등교앞 문방구서 불티::)

“요즘 어린이들 사이에 유행하는 레이저 장난감 잘못 다루면 실명할수도 있어요.”식품의약품안전청은 최근 값싼 중국산 레이저 장난감 및 레이저포인터 등이 안전성을 제대로 검증받지 않은 채 마구 수입되고있어 경각심을 주기위해 위험성과 주의사항을 담은 “레이저? 그럼 이거 알아두세요”라는 홍보물을 발간, 전국의 보건소와 초등학교에 배포했다고 26일 밝혔다.

레이저는 1∼5㎽(메가와트) 정도에 눈깜빡할 시간(0.25초)만 노출돼도 눈에 나쁜 영향을 줄 정도로 좋지 않다. 또 눈에 정면으로 노출되면 망막이 손상되고 시력이 떨어지며 심하면 시력을 잃을 정도로 위험하다. 특히 어두운 공연장 등에서 레이저를 쏘이면 동공이 확대된 상태여서 더욱 위험하다며 사용하지 말것을 당부했다.

식약청 관계자는 “레이저 기기는 잘못 다루면 눈에 치명적일 수도 있으나 학교앞 문방구 등에서 어린이들에게 마구 판매되고 있다”며 “19세미만 미성년자에게 판매할 경우 3년이하 징역 또는2000만원의 벌금이 부과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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